[김연수의 따듯한 생각]

[오피니언타임스=김연수] 기말고사가 끝난 후 기숙사 퇴사 마지막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아닌 어느 금요일에 편지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알아차렸지만, 생각보다 늦잠을 자서 바로 편지를 읽지 못했다. 대신 다이어리 사이에 편지를 끼워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편지는 1년을 함께 한 그녀의 마지막 인사였다. 맞은편 책상과 침대에는 주인의 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해가 지나면 우리는 아마 이전처럼 얼굴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기숙사에서 짐을 빼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내 짐마저 모두 빼고 나니 왁자지껄하고 늘 장난기가 넘쳤던 방 안이 고요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적막이 낯설어 애꿎은 장롱 문만 여닫았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보고 싶었다. 이별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다.

ⓒ픽사베이

스무 살에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을 사귄 이후부터 적당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덕분에 ‘진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졌다. 비즈니스 같은 인간관계에서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서로를 찾지 않았고 서로가 필요할 때 상부상조할 뿐이었다. 그걸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고 더 가까워지지 못한 것에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진정으로 친해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감정노동에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또 상처받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애썼다. 그렇게 굳어진 나를 두드린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때때로 누군가의 이유 없는 칭찬이 불편했고 그것에 다른 의도나 목적이 있지 않을까라고 의심했다. 내가 그런 칭찬이나 좋은 말을 들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난 1년 동안 진심 어린 말로 나 자신이 가치 있다고 깨닫게 만들었다. 덕분에 편입 후 새로운 학교와 생활에 적응하느라 잔뜩 긴장한 상태로 힘주고 살았던 나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에 설레곤 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날 편지를 다 읽었을 때는 예견된 이별이어서인지 이미 실컷 울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편지로 이렇게 말했다.

“함께 지낸 기간보다 더 긴 헤어짐을 앞두고 있으니 벌써 사무친다.”

짧지만 간결한 문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녀가 크게 상심한 날에는 내가 촉촉한 쿠키칩을 건넸고 내가 지친 하루 끝에 힘들어할 때는 그녀가 달달한 마카롱을 선물하곤 했다. 좋아하던 과일, 비슷한 식성과 식사 속도, 이름은 잘 모르지만 분명 흥얼거리게 되던 팝송들, 함께 봤던 커다란 트리, 미세먼지가 많은 날 챙겨주던 마스크까지 그녀는 아마 다양한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주 긴 시간을 들여 그녀를 그리워할 것만 같다. 그게 결코 싫지 않아서 좋다. 아니, 오히려 이런 기억들이 있기에 더없이 의미 있는 한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함께해서 빛났던 시간을 추억하며 글을 마친다.

- 날이 무척 추운 밤, with love, Daisy의 자존감 요정이 -

김연수

제 그림자의 키가 작았던 날들을 기억하려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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