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기행 6]

[오피니언타임스=신세미] 대서양 연안의 휴양지,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은 미식의 도시다. 산세바스티안에는 미슐랭 ‘별 셋’ 식당 3곳을 포함해 미슐랭 스타 식당만 10곳이 넘는다. 4년제 대학 과정의 요리학교 바스크 컬티너리 센터(BCC)는 쉐프 지망자들의 꿈이다. 9월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7월 재즈페스티발로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해변 도시답게 태양의 계절이면 서퍼들로 붐빈다.

그러나 지난 11월 초 북 스페인 여행 중 산세바스티안에서 1박2일은 소문난 미식 영화 음악 체험보다 이 도시와 연이 있는 두 미술가의 흔적을 쫓는 순례였다. 스페인 조각가 에두아르도 칠리다(1924~2002)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 두 작가는 활동의 시대, 배경과 작업은 전혀 다르지만, 이 도시를 작품에 끌어들였기에 관심이 갔다.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의 콘차 해변. ⓒ신세미

‘현대조각의 거장’ 칠리다는 산세바스티안 태생이다.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세계적 조각가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에 설치된 작품과 더불어 작가를 보다 새롭게 느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칠리다는 스무 살 무렵까지 지역 축구단의 골키퍼였으나 무릎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 둔 뒤 진로를 바꾸었다. 대학서 건축을 전공하다가 파리로 건너가 조각의 길로 들어섰다. 건축을 공부한 조각가는 주로 철 돌을 소재로 공간을 탐구하며 절제된 형태의 추상조각 및 판화를 발표했다.

산세바스티안의 중심부인 콘차해변에 설치된 칠리다의 화강암 조각 ‘플레밍에 경배’. ⓒ신세미

이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콘차 해변의 산책로에서 칠리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해변 도로의 왼쪽 중앙에서 바다 건너편의 야산을 마주하고 있는 칠리다의 화강암 조각은 ‘플레밍에 대한 오마주’다. 또 거칠게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의 서쪽 끝의 다소 외진 위치에는 제목부터 시적인 ‘바람의 빗’이 설치돼 있었다.

산세바스티안 콘차해변의 서쪽 끝부분에 설치된 철조각 칠리다의 ‘바람의 빗’. 총 3점이 각기 다른 위치에 설치돼 있다. 큰 파도가 몰아치면 바닥의 돌 구멍사이로 바닷물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설치된 지형의 돌 모양도 빗처럼 가늘게 갈라져있다.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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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밍에 대한 오마주’는 칠리다가 페니실린을 발명한 스코틀랜드 과학자 플레밍에 경의를 표한 작품. 산세바스티안 의회의 의뢰를 받아 1990년 현 위치에 설치한 일종의 비석이다.

한편 찻길에서 걸어서 10분여 거리의 가파른 돌 벼랑 밑에 1977년 설치된 ‘바람의 빗’은 콘차 해변의 상징처럼 유명하다. 높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흰 물거품이 부서지는 곳, 각기 다른 위치에 쇠 갈고리 모양의 작품 3점이 삼각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40년 세월에 붉게 녹이 난 모습으로 주위 경관과 어우러지면 자연의 일부가 돼 있었다.

‘바람의 빗’을 통해 조각은 바람 파도와 하나가 되고, 철이 돌 물과 만났다. 매 순간 꼿꼿이 서 있는 바위, 일렁이는 파도, 혹은 비바람을 가두는 고리마냥 다양한 형상을 드러냈다. 큰 파도가 들이칠 때면 돌 바닥의 구멍 사이로 물보라가 솟구쳐 오르는 장관이 펼쳐졌다.

칠리다의 판화와 아시아도자기 컬렉션들로 꾸민 산세바스티안 니자호텔 내부. ⓒ신세미

현지 정보에 밝은 지인 덕에 일찌감치 예약한 니자 호텔의 명함이며 인쇄물에 칠리다의 기하학적 이미지가 새겨 있었다. 칠리다의 딸이 운영하는 숙소였다. 현지어로 프랑스 니스를 뜻하는 니자 호텔은 객실 유리창 밖으로 콘차 해변이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위치. 1층 엘리베이터 앞, 계단 벽면에 칠리다의 흑백 판화가 걸려 있었다. 1층 로비 장식장에는 중국 일본의 도자기 및 자개 장식의 시계 등이 놓여 있었다.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쿠살컨퍼런스센터와 장식적인 녹색 기둥의 주리올라다리.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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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까지 인파로 붐비는 구시가지의 판초스바들.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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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바스티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90년전 행적을 부분적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나혜석의 유화로 전해지는 스페인 바닷가 풍경화 3점은 각기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항구’, ‘스페인 해수욕장’ 등으로 지명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나혜석의 기록을 토대로 후대 연구가들이 그림과 스페인 해변 도시의 이미지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나혜석이 1928년 경 산세바스티안서 그린 해변 풍경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의 제안대로 ‘스페인 해수욕장’ 풍경화의 복사본을 들고 콘차 해변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동에서 서로 둘러보며 유화 복사본 속 풍경과 해변 풍경을 대조해보니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실제 도시의 풍경이 흡사했다. “그림의 왼쪽에 그려진 시청사의 쌍둥이 종탑과 뒤쪽 산타마리아 성당의 종탑이 그림과 일치하며 뒷산의 절개지까지 그림과 풍경이 일치한다”는 정 씨의 지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혜석의 1928년 작 유화 ‘스페인 해수욕장’.  (링크를 누르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bit.ly/2s7zER0

콘차 해변의 미라마르궁 부근서 내려다본 원경이 ‘스페인 해수욕장’ 그림과 닮았다.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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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한국 여성 최초로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익힌, 여성 서양화가 1호. 그는 1920년대 후반 세계 일주를 한 최초의 한국여성이기도 했다.

일본 외교관이던 남편 김우영이 만주 근무 후 특별 휴가로 부부 세계 일주의 기회를 얻었던 것. 당시 나혜석의 세계 일주 소식은 신문에 기사화될 만큼 상상조차 어렵던 엄청난 뉴스였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여 해외에 머물렀다. 남편이 독일로 법학 공부를 하는 9개월여 혼자 파리에 남아 미술 공부를 했고, 부부 동반으로 유럽 미국 러시아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당시 ‘삼천리’ ‘중앙’ 등의 잡지에 실린 나혜석의 여행기 중 ‘열정의 서반아행’이란 제목의 스페인기행문도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나혜석은 1928년 8월 파리에서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해 1박2일 일정을 보내고 마드리드로 이동했고, 스페인여행의 경험을 풍경화에 담아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도 실현이 어려운 세계 일주를 90년전 일찌감치 체험하고 유럽 풍경을 그림에 담았던 나혜석. 20세기 초반의 신여성은 그러나 20,30대 시절의 화려한 삶과 정반대로 불우한 말년을 보냈고 전해지는 작품도 많지 않다. 한국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3.1독립운동에도 참여했던 신여성은 파리 체류 시절 남편 이외의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 끝에 귀국 후 이혼하고 사회적 냉대 속에 잊혀졌던 것이다.

이국서 서로 다른 배경의 두 작가의 흔적을 쫓으며 문득 영화 같은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어 본다. 1928년 8월 어느 여름 날, 당시 4세의 칠리다와 32세의 나혜석이 어쩌면 산세바스티안 콘차 해변의 어느 길에서 스쳐 지나는 그 때 그 순간으로…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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