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렬의 맹렬시선]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어린이집에서 친해진 딸아이 또래의 가족들과 함께 대부도의 펜션을 빌려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라 또래 아이의 아버지가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는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4살 즈음인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는 루돌프를 타고 선물을 가져오는 멋진 할아버지다. 산타클로스가 딸에게 물었다. 올 한해 착한 일을 많이 했으니 어떤 선물을 갖고 싶니? 딸은 ‘마리모’라고 대답했고 산타는 난감해했다. 산타는 미리 준비한 장난감을 서둘러 전달하고 2층 계단으로 황급히 떠났다.

아이 입에서 ‘마리모’가 나올지 몰랐다. 마리모는 딸아이와 함께 몇 달 전 서점에 들렀을 때 봤던 이끼의 이름이다. 동그란 공처럼 굴러다니는 녹색 이끼가 조그만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개미에 이어 이끼도 파는 세상이다. 신기해서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는데 딸아이도 이를 유심히 보고 기억했던 모양이다. 짧은 여행이 끝난 후 아내는 밤사이 딸아이에게 몰래 편지를 썼다. 발신인은 산타다. 산타 할아버지가 깜빡하고 마리모를 준비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엄마,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를 대신해 마리모를 사 줄 것이라는 편지였다. 딸은 산타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듣더니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명렬

마리모를 샀다. 처음 들른 서점에서는 매장이 없어진 바람에 헛걸음하고, 다른 매장을 수소문하여 어렵사리 구했다. 1년생 기준으로 만 원 남짓한 가격이다. 1년쯤 자란 녀석이라고 하지만 크기는 겨우 엄지손톱만 하다. 자연상태에서 테니스 공만 한 크기까지 자라는데 무려 100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동봉된 안내서에는 1~2주에 한 번씩 물을 갈아주고 더운 여름에는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적혀있다. 원산지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의 호수여서 차가운 곳을 선호한다고 한다.

딸은 자고 일어나자마자 마리모를 찾는다. 마리모의 이름도 지었다. 자신의 이름을 넣어 OO 마리모라 부르며 즐거워한다. 마리모가 기분이 좋으면 둥둥 떠다닌다고 했더니, 유리병을 마구 흔들어 억지로 마리모를 띄우곤 한다. 너무 흔들면 마리모가 어지러워 멀미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조심스레 병을 내려놓았다. 어지간히 마리모가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꾹 참고 있다가 산타 할아버지가 갖고 싶은 것을 물어보고 나서야 마리모라고 대답을 한 것이 내심 안쓰럽다. 딸아이는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크게 내색을 하지 않는다. 4살짜리면 떼를 쓰고 드러눕기도 한다는데 그런 게 없다. 명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난감 코너에 데려가 원하는 것을 사준다고 재촉을 해도 선뜻 고르질 않는다.

그동안 딸에게 원하는 것을 사주질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쇼핑센터 장난감 코너에서 딸아이가 자주 쳐다보는 것이 있으면 바코드나 제품명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가 인터넷 쇼핑으로 주문하곤 했다. 장난감들이 고가인데다가 인터넷 쇼핑몰은 별도 할인 쿠폰을 적용하면 50% 이상 저렴하기도 했다. 딸의 기다림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딸은 택배 아저씨가 언제 오냐며 손가락을 꼽으며 기다렸다. 며칠 후 택배 박스를 뜯을 때 딸이 행복해 하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때론 장난감 사진만 찍어놓고 주문하지 않은 적도 많다. 딸은 기다림과 포기에 이미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아빠로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내와 약속을 했다. 아이에게 선물이나 장난감을 사주려고 데려가서 딸이 원하는 것을 고르면 인터넷 쇼핑과 비교하지 않고 바로 사주기로 했다. 당장 사주지 않을 거면 데려가지 말자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마리모가 딸아이 가슴에 박혀 삐죽삐죽 자라고 있었을까? 물론 원하는 모든 것을 사줄 수는 없다. 돈은 한정되어 있고, 장난감을 쌓아둘 공간도 넉넉하진 않다. 하지만 선물이라면 응당 바로 손에 쥐어야 하는 게 맞다. 인생에선 돈보다 타이밍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동창에게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의 의미를 아이가 알아차리는 것은 분명 어른의 실수다. 새하얀 아이의 도화지에 벌써 어른의 때를 입히게 될까 봐 조심스럽다.   

서늘한 곳에서 물만 제대로 갈아준다면 우리 가족과 오랫동안 함께 할 마리모다. 마리모가 자라는 속도보다 딸은 훨씬 빠르게 자랄 것이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서서히 늙어갈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의 속도는 다르게 흐른다. 하지만 산타의 부탁으로 마리모를 사러 가며 가족이 즐거워했던 기억은 함께이다. 바쁜 도시 생활이지만 때론 마리모의 느린 시간에 발맞춰 천천히 가족의 추억을 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감사의 인사를 드려본다. 산타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명렬

달거나 짜지 않은 담백한 글을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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