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19대 대선 후보들이 내건 공약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재인 후보의 ‘광화문대통령 시대’였다. 청와대를 시민공원으로 만들고, 자신은 광화문의 정부제1종합청사에서 집무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2012년 대선 때에 이어 두 번씩이나 내건 공약이었다.

대통령이 되고나면 맘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실천할 수만 있다면 그는 그것만으로도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고, 국민들 사이에서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 준 대통령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길한 예감일수록 맞는다고 했던가, 너무 큰 희망은 낙망이 된다고 했던가? 이 공약은 그렇게 백지화됐다. 이 공약을 위해 만들었던 ‘광화문 대통령 시대 위원회’ 유홍준 자문위원은 지난 4일 “집무실을 현 단계에서 광화문 청사로 이전하면 청와대 영빈관ㆍ본관ㆍ헬기장 등 집무실 이외 주요기능 대체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국민경제 자문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관저와 헬기장 마련이 어렵다는 게 이유라니 낯간지럽다. 낯간지러운 변명은 또 있다. 문대통령이 의전행사와 경호상의 애로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또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판에 안 써도 될 예산을 쓰게 되는 것도, 미래의 대통령들에게도 부담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풍수상으로 ‘흉지’임에도 청와대를 쓸 수밖에 없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괴기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청와대가 흉지라면 그것의 원인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밀실화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감수하면서 유지한다고 하는 말은 문대통령이 불운도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대통령을 위해서나 국민을 위해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노무현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을 지낸 문 대통령이 이런 사정을 모르고 두 번이나 공약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안 하기로 하면 몰라도 하기로 하면 얼마든지 해결책도 있어 보인다. 청와대가 시민공원이 되더라도 헬기장이나 의전행사용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통행을 통제한다해서 그것을 불편하게 생각할 시민은 없을 것이다.

청와대가 대통령 관저를 얼마나 큰 규모로 생각했는지는 모르나 서울 시내에서 집 한 채 지을 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정녕 구할 수 없다면 그린벨트를 풀어서 관저부지로 쓰겠다고 해도 시민들은 용납할 것이다. 광화문 청사를 대통령집무실로 리모델링하거나 관저를 새로 짓는 것은 일종의 이사비용이다. 큰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런 예산을 탓할 시민도 없을 것이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 계획이다. 광화문 청사가 대통령집무실이 되면 청사 정문으로부터 100m이내에선 시위를 못하게 된다. 광장을 시위장소로 쓰겠다는 사람들에겐 다소의 불편이 가해질 수도 있다. 그 정도의 불편은 대통령을 가까이에 두기 위해 겪는 것이므로 감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이전 대통령 중에는 광화문 시위를 북악산에 올라가 바라본 경우도 있었지만, 광화문청사에서는 집무실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대통령이 시위자를 집무실로 부르거나, 직접 광장으로 나가 소통함으로써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광화문 대통령시대를 공약했노라고 수차례 강조했던 문 대통령이다.

대통령 취임 초부터 나왔던 안 되는 이유 가운데는 종합청사가 청와대보다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권에 더 노출돼 있다는 것도 있었다. 지금의 남북관계에선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되어버렸으나, 불과 1km도 안 되는 거리의 두 건물을 두고 적으로부터의 안전을 따질 때 광화문 대통령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안 되는 이유를 한 마다로 줄이면 ‘권력의 중독증상’이다. 권력자는 대중과의 소통을 말하면서 동시에 대중으로부터 유리(遊離)되기를 원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권력에 탐닉할수록, 국민의 편리가 자신의 불편으로 느껴질수록, 후자로 흐르게 된다. 이 때 대통령의 불편은 국민의 불편으로 둔갑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시절부터 청와대는 국민과 격리된 공간이었다. 구중궁궐 밀실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때 그곳에선 국민과 유리된 권력일수록 권위와 신비감을 풍길 수 있다는 사고가 지배했다.

문 대통령이 박근혜 청와대의 교훈까지 실어 공약한 광화문 대통령을 스스로 백지화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실행코자 했으나 청와대 비서진 등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불편을 대통령의 불편으로 둔갑시킨 경우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이 취임 후 백지화 또는 재고했어야 할 공약들은 너무 많다. 그런 공약들에는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일관성 유지를 명분으로 그런 공약들을 강행해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됐다.

이에 반해 청와대 개방에 반대할 국민은 거의 없다. 이행하기는 쉽고, 지지율은 올릴 수 있는 공약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는 왜 이렇게 공약이행을 거꾸로 하고 있을까? 청와대 개방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명쾌하게 보여 준 사람이 멕시코의 로페즈 오브라도 대통령이다. 그가 내건 공약 가운데 대통령궁의 시민개방 공약은 문 대통령 공약을 베꼈다고 할 정도로 똑같다.

멕시코 역사에서 89년만의 첫 좌파 대통령인 그는 지난해 12월 1일 취임하면서 그가 약속한 대통령 궁 ‘로스 피노스(소나무)’를 일반에게 개방했다. 1930년대 건축 당시부터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됐던 이곳은 1934년부터 2018년까지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돼왔다. 청와대가 ‘흉지’로 불렸다면 이곳은 ‘유령의 집’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는 사저를 관저로 이용한다. 대통령 전용기 보잉787드림라이너를 팔고, 해외여행에는 상업용 여객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승용차도 관용차 대신 자신이 쓰던 소형차를 계속 타기로 했다. 재임 중에 형사 소추되지 않는 대통령의 특권도 내려놓았다. 죄가 있으면 일반인과 똑같이 법의 심판을 받겠다는 것이다. 경호원도 줄였고, 기자들과도 매일 회견을 갖겠다고 했다.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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