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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해석의 학문인 ‘역사(歷史)’, 교차분석을 통해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9.01.10 10:23

[논객닷컴=김희태] 여러분들은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어떤 것을 가장 중점에 두시는지?

같은 내용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들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란 해석의 학문이기에 오늘 우리가 평가하는 현상이 먼 미래에는 다르게 인식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역사는 좀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한 바 있다. 단순히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역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함께 인식한다면 역사는 죽어있는 학문이 아닌, 여전히 살아 숨쉬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역사를 바라볼 때 중요한 근거가 되는 요소 기록의 관점 : 문헌사료 고고학적 관점 : 유물 현장 : 지명 혹은 전승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기록의 관점에서, 경주 괘릉이 원성왕릉으로 비정되기까지

역사를 조명하는데 있어 일차적으로 중요하게 인식이 되는 것은 ‘기록’이다. 보통 기록이라고 하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글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남겨진 글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보통 우리가 역사서라고 할 때 <조선왕조실록> 혹은 <삼국사기>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서들을 보다 보면 어떤 것은 ‘정사’요, 어떤 것은 ‘야사’라며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사와 야사는 어떤 차이를 보일까?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이자 역사서 ⓒ김희태

우선 ‘정사’라고 하면 현 왕조가 앞선 왕조를 인정, 공식적으로 편찬한 사서를 말한다. 즉 고려가 건국된 뒤 <삼국사기>가, 조선이 건국된 뒤 <고려사>가 편찬되는 식이다. 이러한 사서는 편년체 방식으로 서술돼있는 것이 특징으로, 국가의 주도 혹은 승인이라는 ‘정당성’이 있을 경우 붙여지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야사’가 있는데, 정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즉 개인이 편찬한 기록이나 문집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체로 자유로운 기술방식이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기사말본체’의 특징을 보이는 <삼국유사>, 조선시대 야사의 대명사격인 <연려실기술>, <금계필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역사를 접근할 때 기록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기록의 내용이 일부 차이를 보이거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록을 바라볼 때 하나의 문헌사료만을 가지고 맹신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즉 “A 사료에 이러한 내용이 있으니, 이건 사실이야~”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A 사료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동 시대의 자료인 B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 걸로 봐서, 사실을 가능성이 높다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료들 간에 교차분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성을 추출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경주 원성왕릉, 본래 괘릉으로 불렸지만 사료와 유물, 현장의 교차분석을 통해 경주 원성왕릉으로 비정되었다. ⓒ김희태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경주 원성왕릉이다. 경주 원성왕릉은 본래 ‘괘릉(掛陵)’으로 불렸던 곳으로, <동경잡기>를 보면 능의 내부에 물이 고여 관을 허공에 걸어두었다는데서 유래했다. 즉 조선시대까지도 괘릉은 피장자를 알 수 없는 고분이었던 셈이다. 그러다 교차분석을 통해 그 위치가 밝혀졌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원성왕이 세상을 떠난 뒤 ‘봉덕사(奉德寺)’ 남쪽에 화장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해당 기록만 봤을 때는 원성왕릉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숭복사지 귀부, 최치원이 쓴 대숭복사비가 세워진 귀부로, 보기 드물게 쌍거북 형태를 하고 있다. ⓒ김희태

반면 동 시대의 기록인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숭복사(崇福寺)’에 있으며, 이곳에 최치원이 쓴 비석이 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 괘릉 인근의 말방리에서 ‘숭복사지’로 추정되는 사찰의 흔적과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有唐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銘)”의 비편이 확인되었다. 즉 기록과 현장, 유물 등의 교차분석을 통해 괘릉의 피장자가 규명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록을 접근할 때는 중요성을 감안하면서, 동시에 교차분석을 통해 현상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 고고학의 관점에서, 왕흥사지의 실체를 밝혀준 ‘왕흥사지 사리기’

앞서 기록의 중요성을 언급했지만 분명 단점이 존재한다. 즉 기록이 모든 역사를 증명해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기록의 소실이라는 측면이 가장 아쉽게 다가온다. 당장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신집><유기> 백제 <백제서기> 신라 <국사> 등 스스로 기록을 남겼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료들을 참고해야 하는데, 이들 사료의 시각이 지나치게 자국 위주인 이유로 기록의 진실성을 체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과제다. 기록만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기에 고고학적 관점과 현장의 교차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흔히 고고학이라고 하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영화의 주인공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도굴범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이는 고고학이 단순히 보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나 성과를 기록해 역사를 해석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즉 애초에 목적 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고고학 = 보물찾기'는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한편 최근 주목도가 높아진 가야사의 경우 기록이 부족해 상당 부분을 발굴조사로 출토되는 유물이나 현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백마강, 돌출된 부소산성 방향은 옛 백제의 도읍인 사비이며, 강 건너 맞은편에 왕흥사지가 위치하고 있다. ⓒ김희태

그렇다면 역사를 바라볼 때 기록과 고고학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까? 그 대표적인 사례로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왕흥사지’를 들 수 있다. 왕흥사지는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부소산성과 마주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그 절은 강가에 있고, 채색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임금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왕이 배를 타고 왕흥사지로 이동했다는 사실과 왕이 예불하러 가는 사찰이라는 점에서 그 지위가 상당히 높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흥사지의 전경, 목탑지에서 왕흥사의 창건 시기와 목적을 알 수 있는 왕흥사지 사리기가 출토되었다. ⓒ김희태

한편 ‘왕흥사(王興寺)’의 창건과 관련해 「삼국사기」는 법왕 때인 600년에, 왕흥사가 창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 무왕 조의 기록을 보면 634년 왕흥사가 창건되었다고 밝히고 있어, 같은 기록에서도 왕흥사의 창건 연대가 틀린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삼국유사」는 최초 법왕 때 창건하려고 터를 준비했다가 무왕 때 완성한 것으로 적고 있으며, 이때의 사찰이 왕흥사가 아닌 ‘미륵사(彌勒寺)’로 나오는 등 왕흥사는 존재했는데, 그 실체에 대해서는 제 각각의 이견이 상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출토된 ‘왕흥사지 사리기’는 기록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2007년에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왕흥사지 사리기는 일종의 사리공양구로 크게 청동제 사리함을 비롯해 은제사리외병, 금제사리외병, 금과 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핵심은 청동제 사리함에 새겨진 각자로, '丁酉年二月十五日 = 정유년 2월 15일', '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 =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백제왕 창은 위덕왕을 말한다.

왕흥사지 사리기, 명문을 통해 왕흥사가 577년에 세워졌고,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의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왕흥사지 사리기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왕흥사를 세운 목적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위의 기록만 봐서는 이 사찰을 왜 만들었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데, ‘왕흥사지 사리기’를 통해 사찰의 건립 목적을 알 수 있는 것은 의미가 있다. 또한 창건연대 역시 위덕왕 시기의 ‘정유년(丁酉年)’은 577년이다. 따라서 왕흥사지 사리기의 명문은 앞선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왕흥사의 창건 연대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역사는 해석의 학문이기 때문에 언제든 명확한 근거가 나오면 학설은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되, 해당 주장의 근거가 되는 사실 관계에 대해서 명확해야 한다.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기록’과 ‘유물’, ‘현장’을 함께 조명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차분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성이 추출될 때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해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것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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