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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국경마을 포르부의 ‘출구 없는 통로’[이베리아 기행 7]
신세미 | 승인 2019.01.14 11:36

[논객닷컴=신세미] 프랑스와 인접한 스페인의 포르부(Portbou)는 일반 지도에서 그 이름을 찾기 힘든 작은 마을이다. 스페인 여행 일정 중 생소한 이름의 포르부를 찾아간 것은 그 마을에 남아 있는 특정 인물의 흔적, 그를 기리는 조형물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 ‘한 사람’은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사상가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이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으로 철학 미학 등에 걸쳐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펼쳤던 그는 나치를 피해 오랜 도피 생활 끝에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 행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도착했지만 입국 허가를 받지 못해 미국 망명이 좌절되자 결국 미완의 원고를 남긴 채 1940년 9월 자살한 곳이 스페인의 포구 마을 포르부다.

지중해와 면한 한적한 국경마을 포르부에 벤야민을 기리는 조형물이 들어선 것은 1994년 5월. 벤야민 사후 50주년을 즈음해 스페인 카탈루니아 자치 정부와 독일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 출신 작가 대니 카라반이 ‘패세지’란 제목의 벤야민 추모작품을 설치했다. 이후 포르부는 ‘벤야민의 마을’로 세계 각지서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포르투의 해변 비탈길에 설치된 대니 카라반의 '패세지'. 철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이 유리 벽 위로 드러나며 감상자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신세미

지난해 11월 초 북 스페인 여행 일정 중 한 나절 포르부에 들렸다. 바르셀로나 인근 도시를 둘러 보는 ‘데이 투어’로 달리의 박물관과 집이 위치한 피게레스, 카다케스를 방문하면서 차로 1시간 거리의 포르부를 찾았다.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 스페인으로 향하는 도로는 험난한 산길을 따라 구비구비 이어졌다. 차창 밖으로 회갈색 바위산의 풍경은 늦가을이란 계절적 요인도 있겠지만 황량해 보였다. 드디어 바다가 보이고 목적지 포르부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의 포구에는 바닷바람이 거셌다. 해안 도로의 절벽에 붙어 있는 ‘패세지. 대니 카라반’ 안내판 위로 작품의 하단 일부만 보일 뿐 올라가는 통로를 찾기 어려웠다. 주택가 골목에서 비탈길을 20분여 걸어 올라가니 편편하게 고른 땅에 발터 벤야민 기념물 안내판과 강철 소재의 조형물이 나타났다.

해풍을 따라 나무들도 한쪽으로 비스듬히 서있는 산비탈에 녹슨 강철판 소재의 작품이 외양을 드러냈다.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급경사 절벽에 설치된 조형물은 특별했다. 네모 세모의 철판 형태는 단순했지만 검붉은 강철판 구조물은 묵직하게 작품 ‘패세지’의 의미, 헌정된 인물의 고난한 삶을 상징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발터 벤야민을 기리는 대니 카라반의 작품 ‘패세지’는 철계단의 양 옆과 위를 철판으로 감싼 터널 형태. 바다쪽 하단의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지중해와 건너편 산이 보이지만 진입 불가다. ⓒ신세미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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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가 자리잡은 산비탈의 위에서 바다 쪽으로 하강하는 ‘패세지’는 계단 형태의 설치 작품. 87단 강철 계단의 양쪽을 2.35m 높이의 철판이 감쌌고 천장까지 철판으로 덮은 터널 같은 구조였다. 바다로 향하는 철 계단의 하단이 해변에 꽂히듯 설계됐다.

바다로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철 계단은 그러나 누구든 바다 쪽으로 발걸음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구서 계단을 내려가면 4분의 3정도 지점에 두툼한 투명 유리의 벽이 버티고 서있었다. 유리 벽 위로 바다의 소용돌이와 흰 물거품을 지켜보는 사람의 모습이 비치는 구조로, 감상자도 작품의 일부였다. 계단을 되돌아 올라도 보이는 것은 돌담과 왼쪽으로 흰 벽의 마을 공동묘지뿐. 작품의 주변은 강철판과 유리, 돌담과 하늘-바다 뿐인 ‘No Way Out’, 출구 없는 막힌 통로였다.

발터 벤야민 기념조형물 안내판(왼쪽). '패세지'의 바다 쪽 계단의 하단 유리벽은 천정없이 열려있다. ⓒ신세미
포르부 해안도로에서 올려다 본 '패세지'의 하단. 양쪽 철판과 유리벽 일부가 보인다. ⓒ신세미
포르부 바닷가의 바위에 붙어있는 '패세지' 작품 안내판. ⓒ신세미

절벽을 뚫고 설치한 좁고 긴 강철 계단 형태의 작품을 통해 작가 대니 카라반은 벤야민의 1940년 그 무렵처럼 출구라곤 보이지 않는 극적 상황, 자유로운 의지를 가로막는 체제를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늦가을 해질녘이라는 시간에다 바다를 면한 산악지대의 국경도시라는 공간적 특성과도 맞물렸던 것 같다. 포르부의 벤야민 기념조형물에서 망명자의 ‘출구 없는 삶’의 절박함, 고독와 절망이 전해졌다.

대니 카라반의 작품 제목인 ‘패세지’는 벤야민이 1927년부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전념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 혹은 ‘패세지 워크’의 용어이자 미국으로 망명을 꾀하며 그 출구를 찾던 벤야민의 마지막 여정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해석된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포르부의 선착장. ⓒ신세미

‘패시지’는 카라반의 작품 구상에 따르면 ‘1 터널, 1 계단, 1 좌석’의 3 가지로 이뤄졌다. 터널 같은 계단 뿐아니라 뒤쪽으로 돌담과 이어지는 5단짜리 철 계단, 중앙에 돌 정육면체가 놓여 있는 가로 세로 4m 넓이의 사각 철판도 ‘패시지’의 일부다.

작품은 강렬한 인상의 철 계단 외에, 척박한 돌산에서 거친 해풍을 힘겹게 버텨낸 키 작은 올리브나무와 포효하는 파도 및 공동묘지, 돌담, 오솔길 등과 하나였다. 자연 속에서 세월의 풍상을 전하는 검붉게 녹슨 철판과 더불어 자유를 갈망했으나 억압적 폭력적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의 끈을 놓았던 비극적 상황을 체험케 했다.

발터 벤야민은 이름만 아는 정도였으나 기념 조형물이 설치된 포르부에서 간략하게 그의 삶, 생을 마감할 무렵의 상황을 접하며 피상적이나마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지식인의 삶과 사상에 다가서는 계기가 됐다.  

‘아우라’라는 용어를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분위기’를 뜻하는 예술 개념으로 구체화시킨 벤야민. 그가 1920~1940년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을 통해 발표한 개념들은 인문사회과학의 광범위한 주제에 걸쳐 새롭게 연구되고, 영화 사진 음악 미술 등의 장르에 영향을 미치며 21세기 들어서도 벤야민 이론에 대한 재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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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미  dream0d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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