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역사의 해석에 있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역사와 관련한 글을 쓰다보면 가장 휘발성이 높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글이 고대사 분야다. 

특히 ‘사이비 역사학(=유사역사학)’을 추종하는 이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 중 하나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이른바 <낙랑군재평양설>이다. 자칭 재야사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본래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학설의 이견이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그 순간 나는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런 맙소사~

앞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글처럼, 역사의 해석에 있어 기록의 관점 : 문헌사료 고고학적 관점 : 유물 현장 : 지명 혹은 전승 등을 함께 조명해야 한다. 즉 기록이 모든 역사를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고학이나 현장의 관점은 이를 보완해주는 기제가 된다. 하다못해 논문을 하나 쓰더라도 관련 연구의 주제를 다각도로 비교,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역사의 사실성을 인정받으려면 ‘기록’과 ‘유물’, ‘현장’의 관점에서 함께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이비 역사학’으로 불리는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취사선택된 일부 사료에 국한돼있다. 더 우려스러운 건 주장의 근거가 대개 ‘지명’이나 ‘날씨’, ‘일식’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지명’의 경우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이는 기록과 유물 등 교차검증이 될 때 큰 힘을 발휘한다. 만약 ‘지명’만 가지고 장난친다면 제갈량의 출생지가 ‘화성시’라고 우겨도 된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성도의 ‘남양(南陽)’ 출신인데, 화성시의 지명인 남양과 한자가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갈량의 사당인 ‘용백사(龍柏祠)’도 있었다고 하니, 지명만 가지고 장난치면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이 가능하다.

‘날씨’ 역시 지금도 지역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고, ‘일식’의 경우 최적 관측지만 강조하는데, 최적 관측지가 아니라도 볼 수 있는 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들을 근거로 백제와 신라가 중국에 있다거나, 심지어 고려와 조선 역시 중국에 있었다는 망상적인 ‘대륙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우리 역사를 우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 조한전쟁의 서막과 위만조선의 멸망, 한사군이 설치되다

우선 낙랑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조한전쟁(朝漢戰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해서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고조선이라는 용어 자체는 ▲ 단군신화로 잘 알려진 단군조선 ▲ 은나라 말기의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는 기자조선 ▲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를 찬탈해 세운 위만조선 등을 구분하기 위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조한전쟁’은 위만조선과 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시기적으로 보면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침공으로 시작된다.

고조선의 지표 유물인 고인돌, 사진은 강화 부근리 고인돌이다. ⓒ김희태
비파형 동검, 고조선의 지표 유물로 요동 일대와 한반도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김희태

당시 위만조선에 대해 <사기>는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로 표기되고, 진번과 임둔, 주변의 소읍이 복속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 동방의 예와 진이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아 중계 이익을 취했는데, 이는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분쟁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분쟁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사신으로 온 ‘섭하(涉何)’로, 강경했던 우거왕은 한나라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섭하는 빈손으로 돌아갔다가는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해 고조선 국경까지 나온 비왕 장을 죽였다. 이후 한 무제는 섭하의 공을 치하해 요동동부도위로 임명했는데, 우거왕은 이에 분노해 요동을 기습 공격하고 섭하를 죽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한 무제는 고조선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되고, 죄수들까지 동원하는 총력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기원전 109년부터 시작된 조한전쟁은 육로와 해로에서 동시에 진행이 되었다. 우선 선봉부대인 누선장군 ‘양복(楊僕)’이 이끄는 7천 군대가 수도인 왕검성으로 향했지만, 첫 전투에서 패배했다. 또한 좌장군 ‘순체(荀彘)’가 이끄는 5만의 군사 역시 왕검성으로 진격하나 마찬가지로 패배하며, 한나라 입장에서는 일이 꼬이게 된다. 이후 강화회담의 진행과 결렬이 이어지며, 왕검성 내부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니계상(尼谿相) 참(參), 장군 왕겹(王唊) 등이 한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에 우거왕은 강경하게 반대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장군 왕겹 등은 한나라 진영으로 투항하고, 니계상 참은 우거왕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우거왕은 죽었지만 여전히 왕검성은 대신 성기의 지휘 아래 항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기마저 피살당하며, 결국 한나라에 항복하는 결말을 맞게 되면서 조한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낙랑토성’. 사진 제공 :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러나 ‘조한전쟁’은 한나라가 잘 해서 이긴 전쟁이 아니었다. 이는 사마천이 남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사기> 조선열전에 “장수들 중에 후로 봉해진 사람이 없다”는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위만조선이 멸망하면서 그 자리에는 한사군(=한군현)을 설치했는데, ‘낙랑군(樂浪郡)’과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과 ‘임둔군(臨屯郡)’이다. 이 중 한사군 중 핵심인 곳이 ‘낙랑군’으로 당시의 규모와 일찌감치 폐지된 다른 군현에 비해 400년 이상 더 존속을 했던 중심지였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곧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의 위치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낙랑군은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는 것이다.

■ 낙랑군이 평양에 있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

그렇다면 낙랑군은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기록의 관점 : 문헌사료 고고학적 관점 : 유물 현장 : 지명 혹은 전승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기록의 관점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우선 사료를 참고하는데 있어 동 시기에 만들어진 기록이 뒤의 기록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보통 동 시대의 사료를 ‘1차 사료’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1차 사료’의 기록과 주석은 구분해서 봐야한다는 점이다. 가령 <후한서>의 본문은 당대의 1차 사료가 맞지만, A학자가 자신의 견해를 붙인 주석의 경우 1차 사료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한서>를 보면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만 보면 마치 낙랑군이 요하 일대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해당 기록은 본문이 아닌 주석으로 후대에 작성된 것이다. 즉 주석을 1차 사료로 오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또한 유념해야 할 점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낙랑군이 축출되었지만, 요서로 이동해 한 동안 계속 이어졌는데 이를 ‘교치(僑置)’라 부른다. 훗날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요동의 건안고성을 중심으로 백제를 유지시켜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측 기록에 낙랑이 요서에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논증을 깨뜨리려면 313년 낙랑 축출 이전의 1차 사료에서 낙랑군의 위치가 요서에 있다는 것을 밝히거나 관련 유물이 요서 지역에서 출토될 때 가능한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해 중국 측 사료인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위의 두 기록이 주목되는 건 낙랑군이 있던 동 시기의 기록이라는 점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기록보다 더 우선할 수밖에 없다. 해당 기록에 등장하는 나라들의 위치를 보면 고구려의 경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요동의 동쪽 천 리,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후한서> 동이열전 가운데 예의 위치를 보면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 진한... 동쪽은 큰 바다, 서쪽은 낙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록의 한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마한의 북쪽이 낙랑이고, 남쪽은 왜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낙랑군이 평양에 있음은 명확하다. 물론 기록만으로는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교차분석이 필요한데, 이를 입증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고고학적 관점이다.

낙랑예관(樂浪禮官) 명 수막새,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낙랑 관련 유물은 <낙랑군재평양설>의 중요한 물적 증거가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평양 지역에서 출토되는 낙랑 관련 유물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평양이 북한인 이유로 접근성에 제한이 있지만, 해방 이후 낙랑과 관련한 유물이 학계에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3000기 이상의 낙랑고분과 낙랑과 관련한 명문이 있는 유물, 피장자의 신분을 알려주는 도장과 위세품인 칠기 등의 유물이 눈길을 끈다. 이 중 정백동 1호분에서 출토된 ‘부조예군(夫租薉君)’ 도장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데, 부조는 낙랑군의 속현 중 하나로, 부조 지역을 다스린 예족 군장의 도장인 셈이다. 또한 낙랑의 속현 가운데 하나인 ‘점제현신사비’가 확인되는 등 평양 일대에서만 수 만점이 넘는 낙랑 관련 유물을 발견되고 있다. 일부에서 교역의 가능성이나 조작설 등을 제기하지만 그러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제일 중요한 동 시대에 요서에 나타나지 않는 낙랑군 관련 유물이 왜 평양에서만 집중 출토되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특히 쐐기를 박는 중요 유물이 바로 ‘초원4년 현별 호구부’다. 1993년 평양의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이 죽간은 낙랑군에 속한 속현의 호구수를 기록한 것으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급 유물이다. 평양에 낙랑군이 없었다면 낙랑군 속현의 호구를 적은 문서가 왜 평양에서 나올 수 있는가? 반면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유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기 어렵다. 혹 유물 이야기를 꺼내면 “중국이 일부러 은폐하고 있다”거나 “한국인들에게 보여줄 것 같으냐”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낙랑군이 있었던 시기만 400년이 넘는다. 그런데도 의미 있는 유물이 안 나온다? 이건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점제현신사비, 낙랑군의 속현 중 점제현에 세워진 비석, 낙랑군이 평양에 없다면 ‘점제현신사비’와 ‘부조예군’, ‘초원4년 현별 호구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진 제공 :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럼 마지막으로 현장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과거 평양에서 살았을 우리 선조들이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 이해한다면 좀 더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의 기록을 보면 평양이 ‘왕험성(=왕검성)’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당시 평양에는 ‘단군사(檀君祠)’를 비롯해 ‘기자사(箕子祠)’ 등의 사당이 있고, 심지어 평양부의 북쪽 토산(兎山)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평안남도 강동군에 위치한 대박산에는 북한 학계에서 ‘단군릉’이라 주장하는 곳이 있는데, 이 역시 예전부터 전승이 있어왔던 곳이다. 물론 기자묘나 단군릉을 실제 기자의 무덤이나 단군의 무덤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조선시대에 평양이 왕검성이고, 낙랑군이 있었던 것임을 인식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비정했고, 심지어 순암 안정복(1712~1791)의 경우 그의 저서 <동사강목>을 통해 낙랑의 ‘교치’를 언급하고 있다. 즉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일제 때 만들어진 식민사학의 영향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식민사학 = 낙랑군재평양설”로 등치되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이처럼 기록과 유물, 현장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식민사학을 추종한다고 맹비난하는 건 민족적인 감정에서 볼 때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역사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엄연한 역사 왜곡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우리가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과연 맞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또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한사군을 식민지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재미있는 건 낙랑군은 400년이 넘게 운영이 되었다는 점이다. 보통 중국의 왕조가 200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으로, 단순한 식민지였다면 이런 운영이 가능했을까? 이는 낙랑군에서 고조선의 토착세력이 융화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즉 낙랑군의 고위 관리나 행정 등에 고조선의 토착세력이 활동하고, 이를 통해 낙랑군은 식민지의 개념이 아닌 “고조선 토착세력 + 중국인”이 지배층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방강역고, 정약용은 <아방강역고>를 통해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비정했다. 그럼 정약용도 식민사관에 물들었다고 주장할 것인가? ⓒ김희태

결과적으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해서 우리 역사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낙랑군이 평양에 있음으로 인해서, 313년 낙랑 축출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역사는 해석의 학문이기 때문에, 언제든 명확한 근거가 나오면 학설은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적어도 ‘사이비 역사학’을 주장하는 이들이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으면 기록의 관점 : 문헌사료 고고학적 관점 : 유물 현장 : 지명 혹은 전승 등 종합적으로 근거해 주장을 펼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그저 취사선택된 기록의 일부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우습게 만드는 자충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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