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고구려POWER
고구려 은화(銀貨)[김부복의 고구려POWER 12]
김부복 | 승인 2019.01.30 08:30

[논객닷컴=김부복]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고려 문종 임금의 넷째 아들이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 송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니까 ‘귀족유학’이 아닌 ‘왕족유학’이었다.

‘왕족유학’이었으니, 접시(?)를 닦는 ‘알바’ 따위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의천은 50여 명의 스승 밑에서 공부하며 책을 3000권이나 사서 모았다. 느긋한 유학이었다.

의천은 귀국한 후 셋째형인 숙종 임금에게 송나라에서 사용하는 화폐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를테면 ‘돈 필요론’이었다.

① 쌀이나 면포는 길이 멀 경우, 운반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겨울이나 여름에는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걷기도 힘들다. 반면, 화폐는 가볍고 편리하다.

② 나쁜 상인들은 자와 저울을 속이고, 쌀에 흙과 모래를 섞기도 한다. 화폐는 그런 나쁜 짓을 막을 수 있다.

③ 공무원 봉급을 쌀이나 면포로 지급하고 있는데, 흉작이나 물품이 부족할 때는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화폐는 그럴 염려가 없다.

④ 게다가 쌀이나 면포는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수도 있다. 작년에도 창고에 쌓아둔 면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화폐는 상하지 않는다.

숙종 임금은 의천의 건의를 채택했다. 돈을 찍어낼 ‘주전도감’을 설치, 1만 5000관의 ‘해동통보’를 발행한 된 것이다. 1102년이었다.

하지만 의천은 그 돈을 구경도 할 수 없었다. 해동통보 발행 1년 전인 1101년 8월, 병에 걸려 누워 있다가 10월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그렇다면, 우리는 ‘돈’이라는 것을 1102년 이후에 사용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화폐는 벌써 고구려 때 사용되었다. 그것도 중국 사람이 그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나라 사람 장초금(張楚金)이 쓴 한원(韓苑)에 "고구려는 화폐로 쓰기 위해서 은은 채굴했다"고 한 것이다.

한원은 ‘은산재국서북고려채이위화(銀山在國西北高驪採以爲貨)’라고 했다. 나라의 서북 지역에 있는 ‘은산(銀山)’에서 화폐(爲貨)로 사용할 은을 채굴했다는 얘기다.

한원은 고구려의 ‘려’를 ‘驪’라는 한자로 썼다. ‘당나귀 여(려)’다.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삐딱했기 때문에 일부러 ‘驪’를 골라서 썼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의 화폐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 은산의 구체적인 위치는 ‘안시성 동북쪽 100여 리(銀山在安市東北百餘里)’였다. 그곳에서 수백 가구(有數百家)가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은을 채굴해서 바쳤다(採之以供國用也)고 했다.

‘고구려 제국사’의 저자인 서병국(徐炳國) 박사는 이를 “보기 드문 기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수백 가구’라고 했으니, 500가구만 잡아도 2500명 정도가 채굴 현장에서 일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당시의 한 가구는 대충 5명쯤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할 때 거느린 사람이 ‘763호(戶) 3543명’이었다. 한 가구에 4.6명 정도였다.

‘고구려 화폐’에 관한 기록은 더 있다. 유명한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다. 평강 공주가 황금 팔찌를 팔아서 밭과 집, 노비, 말, 소. 기물 등을 사들여 온달과 살림을 차리는 것이다.

고구려 초기, 유리왕은 선비족 정벌에 공을 세운 ‘부분노’에게 식읍(食邑)을 내렸지만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유리왕은 식읍 대신 ‘황금 30근’을 하사했다. 금과 은은 이렇게 고구려 초부터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

‘외국돈’도 유통되고 있었다.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은 한나라 때도 사용되었던 돈이다. 이  명도전이 북한과 만주 지역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의 교역이 활발했다는 증거다.

물론,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는 영토가 광활했기 때문이다. 전성기 때는 ‘동서의 거리’가 자그마치 6000리나 된다고 했다. 손바닥만 한 ‘남한’에서 5000만 인구가 바글거리는 지금과는 달랐다.

그 광활한 영토에는 농업지역과 은과 철을 생산하는 공업지역, 중국과 교역하는 상업지역이 없을 리 없었다. 양떼를 끌고 다니는 목축지역과, 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수렵지역도 있었다. 그런 지역에서는 아마도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  

중국에도 '법정 화폐' 이외의 다른 화폐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라는 서양 사람은 ‘동방견문록’에서 ‘소금으로 만든 돈’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의 서창(西昌)인 건도(建都)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돈이다.

“소금물을 끓여서 틀 속에 넣으면 빵 덩어리처럼 아래는 평평하고 위는 둥그런 모양이 된다. 무게가 반 파운드 정도 되게 만든다. 그런 다음, 뜨거운 돌 위에 올려놓고 말려서 단단하게 굳힌다. 그 위에 군주의 인장을 찍는데 군주가 임명한 관리가 아니면 누구도 이런 돈을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소액화폐로 쓰인다.”

마르코 폴로가 구경한 원나라에서는 ‘원나라 공식 화폐’ 외에 ‘소금 돈’까지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금 돈’은 다른 용도도 있었다. 부서져서 조각나면 음식에 넣어서 냠냠했다. 어쩌면 ‘소금 돈’의 한 귀퉁이를 슬그머니 깨뜨리는 ‘화폐 훼손’도 없지 않았을 듯싶다.

어쨌거나, 화폐가 유통될 정도였으니 고구려의 ‘경제력’이 만만했을 까닭은 있을 수 없다. 알다시피, 서민들은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에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함락했다는 요동성에는 식량이 50만 섬이나 비축되어 있었다. 50만 섬은 50만 명의 군사가 대충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많은 식량이다.

그런데 이세민은 그 많은 식량을 확보하고도 군사들이 굶주렸다는 핑계로 후퇴를 하고 있다. ‘희한한 전쟁’을 한 것이다. 이 희한한 전쟁은 다음에 따져볼 일이다.

 

김부복  news34567@nongaek.com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매체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논객닷컴 | (03163)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2, 대일빌딩 1405호
대표전화 : 070-7728-8569 | 팩스 : 02-722-65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종국
제호: 논객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78 | 등록일 2011년 9월 27일 | 발행일: 2011년 10월 1일 | 발행ㆍ편집인 : 권혁찬
Copyright © 2019 논객닷컴.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