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화의 요즘론]

[오피니언타임스=허승화] 한국에서 1월 초에 개봉한 영화가 있다.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이었던 러시아 영화 <레토>다. 영화는 흑백인 데다, 러시아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한국 관객을 몰이하는 요소는 적다. 덕분에 관객은 많지 않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자아내는 느낌이 좋았다.

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하는 단어인 ‘레토(Лето)’는 극중 인물이 부르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1980년대말 소련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록그룹 키노(Кино)의 보컬이자 고려인으로도 유명한 빅토르 초이의 젊은 시절을 담고 있다. 혹자는 ‘자본주의 진영에 비틀즈가 있었다면 공산주의 진영에는 키노가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을 만큼, 키노는 당대 소련을 대표하는 록 그룹이었다.

한국 배우인 유태오가 빅토르 초이 역할을 맡았다. 그는 러시아어 원어민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는 목소리와 노래하는 목소리는 각각 다른 러시아 배우가 더빙했다. 때문에 극중 인물은 완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레토> 스틸 이미지 ⓒ픽사베이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몰랐으나, 지금도 러시아에서 키노는 러시아 락의 전설로 불린다고 한다. ‘키노'라는 그룹명은 러시아어로 영화(cinema, film)를 의미한다. 1990년 8월에 빅토르 초이가 의문의 사고를 당하며 요절했기 때문에 키노의 이름은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자유를 노래하고 젊은이들을 이끌었던 키노인만큼 빅토르 초이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신기한 점은 그가 성공한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서 <보헤미안 랩소디>와 차별점을 갖고 있다. 이야기는 그가 갓 밴드를 결성했던 1981년의 레닌 그라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당시 갓 스무살이 된 빅토르 초이는 기타 하나를 메고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며 자신의 음악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젊은이였다. 돈이 없기 때문에 늘 어려움에 부딪히고, 내키는대로 쓴 가사는 공연을 하기 위해 누군가의 검사를 거쳐야 하지만 별 수 없다. 노래 할 곳을 찾기 위해서는 그 방법 뿐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시대가 영화의 주인공인 듯한 인상을 받는다. 영화가 각 캐릭터의 사정보다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당대의 시대상과 정신이다. 자유를 억압 당하고 있었던 당시 소련의 젊은이들은 낮에는 노동을 하면서도 밤마다 미국의 음악을 듣고 그 영향을 받았으며, 자유를 꿈꿨다. 그러나 그 시대 소련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그들이 쓴 가사는 사랑이나 일상이 소재인 것 처럼 꾸며져야 했다.

영화 상에서 주인공 빅토르 초이의 얼굴이 많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한 명의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영화는 아니다. 촘촘히 짜여진 플롯들 사이로 긴장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물들이 살아 있다. 빅토르를 중심으로 3인의 인물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며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자유와 관련하여, 극 중에는 몇몇 눈에 띄는 시퀀스들이 등장한다.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서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등장하는 뮤지컬 씬들이다. 이 씬들에서 극중 인물들은 당시에 할 수 없었던 일탈에 가까운 행동을 일삼으며 노래를 부른다. 상당히 환상적이다. 지나가는 행인이 인물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는 식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군,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관찰자 입장의 캐릭터가 등장하여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거나 그 대사를 말하며 지나간다.

관찰자 캐릭터의 익살스러운 표정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30여년 전에도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의 러시아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상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그들의 말간 표정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진실로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음악과 함께 환상에 가까운 뮤지컬 씬이 흘러갈 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진정으로 노래하고자 하는 ‘여름’이란 것이 무엇인지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다. 잠시였지만 나는 그 시절 레닌그라드로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진정으로 그 시절 젊은이들에게 깊은 동병상련을 느꼈다. 80년대 소련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음에도 영화가 다루는 주제의 보편성 때문인지 꽤 긴 여운이 남았다.

무엇보다 나와는 다른 시대와 땅에서 살다간 빅토르 초이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며 한 인물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인물에게 몰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점을 상기해 보면, 개인적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보다 이 영화를 더 앞에 놓을 수 밖에 없다고 하겠다. 복고도 좋으나 결국 우리는 언제나 지금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영화의 배경은 하얀 입김이 나는 겨울이건만 이들이 꾸준히 노래하고 있는 것은 여름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오래된 이야기는 겨울에 노래하는 여름의 날씨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이 영화는 감독이 정치적인 탄압으로 구속되고 촬영 중단되어 있다가 남아있던 배우와 제작진들이 완성시키는 등 상당히 어렵게 만든 영화기도 하다. 칸 영화제에 참석한 레토 팀이 레드카펫에서 감독의 이름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를 연호하며 석방하라는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화 속 자유를 억압받는 청년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현재 러시아의 이야기가 된다. 꼭 빅토르 초이가 아니었어도 감독은 다른 이야기를 통해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체제 하에, 그가 노래하고 싶은 것은 여름이고 지금은 여전히 겨울이기 때문이다.

허승화

영화과 졸업 후 아직은 글과 영화에 접속되어 산다. 
서울 시민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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