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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침묵이 끝나던 날
곽진학 전 서울신문 전무 | 승인 2019.02.01 09:48

[논객닷컴=곽진학]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나보다. 깊은 계곡마다 잔설(殘雪)을 숨겨 두었지만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서성이고 있다. 저만치 묻혀 진 겨울이 서러워 왜가리 한 마리가 빈 들녘에 서서 잿빛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멀지 않아 황량한 나무 가지에는 새 순이 돋고 강변의 버들강아지도 하아얀 솜털을 내밀며 겨울잠을 털고 화려한 외출을 하리라.

2월은 겨울에서 봄, 죽음에서 부활로 잇는, 가고 오는 세월의 모습을 침묵하며 서 있지만 찬란한 3월의 향연을 기대와 희망으로 기다린다.

ⓒ픽사베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여름이 가면 또 가을이 다가선다. 성경은 사람의 일생을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전도서3장>고 가르친다. 사람마다 그 계기는 다르지만 살다보면 불현듯 하나님과 인간, 사유(思惟)와 실천, 겉모습과 심연(深淵) 등 삶의 궁극적 질문 앞에 홀로 마주 앉아야 할 때가 있다. 발가벗은 자신의 실존과 절망적인 대면을 통하여 사납게 들리던 욕망의 폭풍을 잠재우고 지난 날 익숙하고 편했던 세계를 팽개치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남을 경험케 된다.

여태 것 가슴 깊은 곳에 동여매고 살았던 이념과 가치도 어느 날 의미 없는, 한낱 스쳐 지나가는 세계임을 발견하게 되고 깊은 회의를 느낀다. 죽음과도 같은 질병,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처절한 실패, 예기치 않던 사고(事故) 등 천둥 같은 절망에서 비롯되는 사람도 있고 우연히 집었던 책 한 권, 잠시 머물고 본 그림 한 점을 통해서 변화의 전기(轉機)를 만나는 사람도 있다.

러시아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스위스 바젤 미술관에 있는 '무덤속의 그리스도'<한스 홀바인 그림>를 만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소설 백치 (白痴)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손과 옆구리의 상처, 고통과 아픔이 그대로 새겨진 앙상하고 싸늘한 주검, 신성(神性)을 말끔히 지우고 오직 人性(인성)만을 함축시킨 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모진 채찍으로 뒤틀린 육체, 파랗게 질린 얼굴과 손발!

화성(畵聖) 홀바인이 소란스러운 이 시대,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코 죽어 가면서도 포기 할 수 없었던 인간에 대한 숙명적인 사랑을 나타내고 싶었을까?

죄악과 구원, 타락과 심판 그리고 두려움과 갈등을 함께 지닌 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절망이 아닌 소망과 부활을 던져주고 싶었을까?

2월의 안산(鞍山) 자락에는 산책길 따라 심겨진 황매화가 4월에 필 노란 꽃을 기다리며 맨 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있다. 마치 선비 같은 고고한 기품이다.

3000년의 길고 두터운, 파란만장한 중국 역사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하며 고달팠던 선비 사마천(司馬遷)!  그는 모진 한설(寒雪)을 꿋꿋이 견디고 있는 황매화처럼 '선비의 굴욕을 불후의 사기로 승화시킨 위대한 역사가'이다.  사마천은 한(漢)나라 장수(將帥)이자 친구인 이릉(李陵)을 변명하다 한무제(漢武帝)로부터 궁형(宮刑)을 당했다. 돈 오십만 전(錢)이 없었던 그는 어쩌면 단 한번의 처형으로 편안한(?) 죽음을 택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 사마담의 유업이기도 한 필생의 사기(史記)를 완결하고자 국소 마취도 없던 당시 죽음보다 더 혹독한 궁형을 선택하였다. 그는 궁형이후 환관(宦官)으로 통한(痛恨)의 10년 세월을 보내며 세속과 인연이 끊긴 시간 속에 50만자(字)가 넘는 대작(大作) 사기를 저술하였다.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귀족 출신이자 지식인으로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처참한 형벌을 이기고 끝내 '죽음의 집의 기록'을 완성하는 놀라운 운명의 개척자이다. 그의 휴머니즘적 철학사상은 '무덤속의 그리스도'를 만나 죽음 너머를 응시하는 신앙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인간이 선과 악을 건너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과거와 단절하고 절대타자(絶大他者)를 읽게 되는 적막한 시간, 낡은 자아를 배제(排除)하는 끈질긴 자신과의 싸움.

이 모두 인간들에게 요구되는 자기 정화 (淨化)의 시간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추방시킨 인간만이 진정한 자유를 지니지 않을까?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곽진학 전 서울신문 전무  jinhakkwa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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