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늘의 하프타임단상 12]

[오피니언타임스=최하늘] 오랜만에 하늘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대모산길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공터에 마련해 놓은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열심히 종이 박스들을 정리하고 있는 경비아저씨를 본 아내가 혼잣말을 한다. “저분 정말 성실해 보인다…” 70대 초반은 돼 보이는 연세임에도 더 없이 밝은 표정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좋아 보였나보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치는데 이 어르신이 우리 하늘이를 보고 귀엽다며 반색을 하더니 걸음을 멈춘다. 자기네 집에도 말티즈 치와와 비숑 같은 아이들이 여럿 있단다. 화제가 강아지로 옮아가면 오가는 말이 자연스레 길어진다. 자기 집은 바로 저 건너 ○○아파트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거기라면 강남에서도 비싼 축에 드는 아파트 아닌가 하는 속물 같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친다.

어르신은 자기 아들이 커다란 회계법인에 다니고, 며느리는 모 대학에 학과장으로 있다고 묻지도 않은 가족관계까지 털어 놓는다. 그러면서 일하는 게 좋아서 이렇게 일한다고 덧붙인다. 아내가 월급으로 받은 돈 내 놓으라는 소리 안 하고, 아들 며느리가 매달 몇 십만 원씩 들어 있는 기프트카드를 챙겨준다며 환히 웃는다. 집에 들어와 나에게는 일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 가만히 되짚어 본다.

Ⓒ픽사베이

“일은 신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축복이다.”

긍정심리학(행복학) 강의로 한 때 하바드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던 탈 벤 샤하르(Tal Ben Shahar) 교수의 말이다. 그는 “일을 함으로써 생존하고, 생계를 유지하며,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일을 업보가 아닌 선물로 보는 순간, 일 자체가 소중해질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행복을 얻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일이 갖는 가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는 목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사람들에게 일하는 이유를 물으면 그 대답은 먹고 살기 위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자아실현 등 매우 다양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왜 일을 하는가? 이제 나에게 일은 더 이상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업’이 아니다. 그렇다고 생계에 목적을 둔 ‘생업’이라고 할 수도 없다. 후반기 나의 일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이어야 한다. 적어도 인생 후반기의 일은 그러하길 바란다.

지금 나에게는 일의 목적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후반기 나의 근로형태와 근로시간을 정해야 한다. 이것이 내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전반기처럼 일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일이 주는 경제적 보상의 크기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자칫 균형이 무너질 경우 잃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일중독에 빠져 살아온 지난 30여년, 아내와 두 아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했다. 또 어느 때는 과로와 수면부족으로 혼절해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나의 일 욕심이 함께 일하던 이들을 힘들게 하고, 관계까지 해친 게 가장 큰 후회로 남는다.

코카콜라 전 CEO 더글러스 대프트는 삶을 공중에서 다섯 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 게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각각의 공에 일, 가족, 건강, 친구, 나(영혼)라고 이름붙이고 돌렸을 때, '일 '이란 공은 고무공이어서 떨어뜨리더라도 다시 튀어 오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 ‘건강’ ‘친구’ ‘내 영혼’ 등 다른 네 개는 유리공과 같아, 한번 떨어지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일이 가족이나 건강 돈 여가 사회적관계 등 삶의 다른 영역들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닐 것이다. 요즘 일자리선택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 ‘일과 삶의 균형’(워라벨·Work-life balance) 얘기에 다름 아니다.

사회보장이 취약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일은 가족 건강 돈 관계 등에 더욱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커질 경우 가정이나 건강 사회적관계 등에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것을 본다.

인생 후반기를 잘 보내는데 필요한 조언들이 많지만, 그 중 나에게 특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말이 두어 개 있다. 하나는 “가족부터 챙겨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미 있는 삶은 장기적이고 단체전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며칠이나 회사에 출근하는 게 좋을지 아내에게 물어봤다. 아내는 일주일에 이틀정도만 출근하면 좋겠다고 한다. 일을 더 할 필요가 있다면 재택근무를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에는 더욱 풀기 어려운 문제를 내포한다. 일주일 7일 가운데 2일은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휴일이고, 2일은 일터로 출근한다. 나머지 3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냥 편안히 지내면 되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그게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일까? 그 3일이 한가함을 즐기기 위한 시간들이 된다면,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프타임’ 시리즈를 책으로 내놓고 지난해 세상을 뜬 밥 버포드는 '한가로운 삶'의 함정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한가로운 세계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처럼 평안했다고, 정녕 파라다이스였다고 말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가한 곳이 잠시 머물기에는 좋지만, 평생 눌러앉기에는 그다지 멋진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일과 삶의 균형’ 못지않게 ‘여가와 삶의 균형’도 중요하다. 의미 있고 행복한 후반기를 위해서는 일과 일거리, 취미생활, 봉사활동, 여가, 휴식 등으로 최적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좋아하는 일 여러 개로 슬래시 커리어를 만들고, 여기에 취미생활이나 봉사활동 등을 보태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어느 것에도 끌려 다니지 않는 균형감각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반기를 마치고 하프타임을 보내면서, 일을 하지 않고 취미생활을 해 본 적이 있다. 학창시절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해 볼 요량으로 전기기타와 앰프를 사고, 학원에 다니며 맹연습을 했다. 그런데 오래가질 못했다. 어렸을 때 읽었던 ‘개미와 베짱이’ 얘기가 자꾸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뭔가 께름칙한 게, 마치 숙제 안하고 노는 아이의 심정과도 같았다.

즐겁게 놀고, 평안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이 생계를 위한 일이 됐든, 사회공헌 차원의 무료봉사가 됐든 무조건 일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는 일 안하겠다”던 스스로의 다짐을 내던지고, 은퇴선언 1년 만에 다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듣는 질문이 있다. 하나는 나의 시니어 인턴십에 대한 궁금증이다. 찾아보면 조금 수월한 길도 있을 법 한데, 왜 굳이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하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난 30여년을 언론에서 일했는데 후반기에도 같은 일을 하는데 대한 의구심이다.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게 지겹지도 않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일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고, 또 그것이 자기가 제일 잘하는 일이라면 그 사람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거기에다 그 일이 나머지 삶의 영역들과 균형을 이룬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지금 내가 그러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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