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드라마 sky캐슬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붙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한 쪽에서는 ‘거 봐라, 학종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그러니까 학종 코디가 필요하다.’며 코디 신규 수요를 창출했다. 전자는 후자에게 ‘드라마를 보고도 정신 못 차렸느냐.’며 비판한다. 후자는 억울하다. 후자는 살아남고자 했을 뿐이다. 사람마다 사교육의 침투범위가 다를 수 있다. 드라마가 전파한 것은 사교육의 허용 경계선이다.

입시 병폐를 폭로한다는 주제 의식 안에서, 내가 원했던 혜나의 죽음은 자살이었다. 이 죽음은 타살 같은 자살이다. 혜나는 강한 척했을 뿐, 혼자 남았을 때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리 영악하게 노력해도 서‧연‧고로 대표되는 성벽을 흙수저 학생 혼자 부술 수 없었다. 혜나가 발버둥치다 죽어야, 혜나의 죽음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들은 씁쓸한 비감이 들 것이었다. 악인 없는 슬픔을 통해 시청자는 악의 평범성과 유사한 자기 반성을 했을지도 몰랐다. 자신도 혜나의 죽음에 간접적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고.

ⓒJTBC 스카이캐슬 공식 홈페이지

실제 드라마는 김주영이라는 악인을 만들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학교 시험지를 빼돌리고 살인까지 일삼았다. 대치동 엄마를 상징하던 한서진도 끝내 악인이 되고 말았다. 예서의 시험지 유출 건을 자수한 것은 양심이 아니라 자수가 손해의 최소한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목표 지향성이 강한 악인을 보며 시청자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하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라는, 김주영 이전 sky캐슬의 일상에 면죄부를 부여받은 셈이다. 김주영과 손잡지 않는 한, 예서 엄마처럼 해도 괜찮았다. 아니, 입시판에서는 괜찮은 것들은 일단 해야 했다.

사실, 사교육은 죄가 없다. 매체에 노출된 이미지 때문에 부도덕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사교육은 성(性)이나 밀수품도 아니다. 시장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자유롭게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저출산이 사회 문제이지만 출산하지 않기로 선택한 개인을 탓할 수 없듯이, 비대해지는 사교육은 사회 문제이지만 이 역시도 사교육을 선택하는 개인을 탓할 수 없다. 사교육이 가계에 부담을 주는 것을 빌미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를 사교육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사교육을 쥐어팸으로써 민심을 얻을지는 몰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

또한 다들 알지 않은가? 문제는 입시 구조다. 과잉 경쟁이 사교육을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처럼 몰아간다. 대학이 서열화 되고, 명함이 되는 현실 속에서 과잉 경쟁은 피할 수 없다. 여기에 부실한 공교육이 사교육의 갈증을 부채질한다. 현실의 엄마들은 한서진을 강제받고, 현실의 혜나들은 구조적 폭력을 당한다. 드라마는 윤리의 마지노선을 넘었을 뿐이다.

왜 고등학교에 다녀야 할까? 고등학교의 목적은 (실질적으로 대입이겠지만 교과서적으로는) 지식 습득과 인성 함양일 것이다. 현실의 고등학교는 이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지식은 이미 사교육의 몫이 되었다.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들을 향해 선생님 혼자 떠드는 교실 풍경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더 높은 곳을 위해 재수가 보편화된 입시 시장인데, 아직도 재수를 피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임하는 진학 상담도 공교육 불신에 한몫한다. 앞으로는 유튜브에 대항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정보 접근성이 제한된 본고사 시절과 다르다. 대입 뉴스 댓글마다 달리는 정시 100%의 시대가 온다면 학교는 명백한 시간 낭비다.

학교에는 ‘학창시절’이 내포하는 우정의 냄새가 아직은 어느 정도 살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수준별 이동 수업의 확대로 같은 반인데도 모르는 친구들과 1년을 보내고 있으므로 그 의미는 약화된다. 더군다나 학교 폭력의 위험도 상존한다. 학교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보호하므로 경찰이나 흥신소가 현실적 해결책으로 부상했다. 법 체계 안에서 성인이라면 당하지 않을 자잘한 괴롭힘도 은밀하게 존재한다.

학종의 문제는 이 불량식품을 강매한다는 것이다. 대입에서 학종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학교를 벗어나기를 결심하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 속 예서는 자퇴했다. 예서는 버릇이 없을지언정 자기 공부에 있어서 잘못한 것은 없다. 그러나 대입에 있어 자퇴는 형벌이었다. 2020년 서울대 의예과 입학 정원은 135명이다. 지역균형 30명, 학종 75명, 정시 30명을 선발한다. 지역균형을 제외하면, 자퇴함으로써 서울대 의예과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의 70%를 상실한 것이다.

서울대가 극심하긴 하지만 다른 대학들의 사정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학종을 늘리는 추세다. 아무리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아도 학생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학교에 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학종은 사망 선고 직전의 고등학교에 매달린 심폐소생기나 다름없다.

학종을 없애라는 구호와 학종 코디를 구하는 현실의 접점은 결국 공교육이다. 학교가 제대로 서면 사교육은 없어지진 않더라도 줄어들 것이다. 애초에 사교육 시장은 먹물 막장 아닌가? 임용에 합격한 인재들이 사교육 강사보다 신뢰받지 못한다면, 교육 당국은 인재 활용법에 대한 구조적 고민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아직은 멀어 보인다. 입시 성과를 내야 하는 학교에서 스펙을 몰아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창의적 활동 사항과 세부능력 및 특기 사항을 학생들이 스스로 쓰게 떠넘기기도 한다. 백 수십 명을 관리해야 하는 교과목 선생님들이나 기타 잡무까지 떠맡는 담임 선생님으로서는 학생 개인의 입시 실패 책임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 것이다. 학생들에게 맡겨진 학생부는 사교육 시장의 좋은 먹거리다.

학종, 취지는 좋다. 개인의 다양한 재능을 학교생활 중심으로 평가해서 창의적 인재를 선발한다고 하니까. 그러나 이상만 저 혼자 뛰어가 뒤쳐진 현실은 아수라장이다. 학교 시스템은 학종 준비가 덜 되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으로 학생을 평가하므로 학생은 소설이 필요하다. 코디는 소설가가 되어 학생의 독서, 봉사, 창의적 활동 사항, 세부능력 및 특기 사항의 개요를 짠다. 학생은 그 개요를 실천하여 소설을 현실로 완성한다. 이 연결고리의 효율을 학교가 무마할 수 있는가?

사교육을 살찌우는 것은 학교다. 지난 달 28일 교육부장관이 기자간담회에서 말한 “지난해 발표한 2022 대입제도 개편안에 포함된 학종의 공정성을 높이는 방안이 안착되고, 고등학생들이 대학이 아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게 사교육 시장을 압박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대책”에는 그런 문제 의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2022년에, ‘고등학생들이 대학이 아닌 다양한 선택을’하는 게 가능할까? 또 옳지만 공허한 말로, 현실을 팽개치지 않기를 바란다.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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