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한때는 여행이 취미라고 말한 적도 있고, 음악감상이 취미였던 적도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낚시터에서 이어폰 꽂고 볼륨을 높여놓고 들으며 낚시를 하니... 따지고 보면 몇가지 취미를 집대성한 것이 낚시로써, 나의 취미생활은 결코 편향되지 않은 것이고, 그쯤이면 나로서는 취미로써 부족함이 없다. 이미 50년 가까이 된 취미이기 때문에 내가 낚시를 선호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거니와 묻는다 해도 나 역시 대답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혹시라도 누가 물으면 어느 시인처럼 "그냥 웃지요"가 된다.

골프가 취미인 친구들이 나를 향해 '운동도 되지 않고 허리와 무릎을 박살내는 낚시 따위가 취미라니... 골프로 한번 바꿔봐. 한번 같이 공치러 나가자구.' 혀를 차며 골프를 권할 때마다, 그때도 나는 "그냥 웃지요"가 된다. 골프가 나쁜 운동일리도 없고, 그들의 지적이 전혀 틀렸다거나 터무니없는 권유를 한 것은 아니겠지만, 남의 취미를 놓고 이러쿵 저러쿵 빈정대며 '골프야말로 최고의 취미'라거나 '골프를 못쳐서야 어찌....운운'하며 '제 잘났다'는 식의 몰상식함에 이르게 되면 그런 자들의 가치관에서부터 교양정도까지 깊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픽사베이

어쨌거나 '무엇이 됐건' 남의 것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작자들이 무식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열등적 우월의식을 지닌 콤플렉스형 인간임이 확실하다. 마치 안방의 TV와 거실의 오디오를 놓고 ‘어느 것이 좋으냐’를 따지는 식으로 상대방을 공박하다간 상대에 따라서는 개망신할 수도 있으니 입조심....처신 똑바로 하고 살 일이다.

내가 느끼는 낚시의 매력은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 날짜와 장소를 정해 <혼자> 떠날 수 있으며 <혼자>의 결정만으로 자리를 뜰 수 있다는 것이다. 낚시를 놓고, "거...원.....청승맞게....혼자서...."라고 말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기도 하다. 여럿이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취미도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미가 본격적으로 그 위력과 의미를 발휘하게 되는 때가 바로 <청승맞게> <혼자> 살게 되는 장년.노년의 때라고 볼 때, 나는 낚시가 그에 합당한 취미라는 생각이고, 내가 마침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60세이던 1974년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산하기관 등에서 74세까지 민간기업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던 비교적 행복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이런 저런 취미를 가지고 폼깨나 잡아보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그런 취미들은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부터,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부터 계속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매일 아침마다 1946년 월남 후부터 1984년까지 살았던 북아현동으로 건너 가 친구영감들과 복덕방에 앉아 <100원빵 민화투>를 치게 되었고, 그것은 아버지의 취미 이상의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동네 영감탱이들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다. <100원빵 민화투>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다. 담배 냄새에 찌든 복덕방 구석이 구역질난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동네 영감들을 별로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고, 복덕방을 휴식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항차 100원빵 민화투를 치며 희희낙락하는 것이 결코 당신의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감들과 복덕방에서 동전을 주고받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화려했던 젊은 날을 떠올렸을 테고, 방귀깨나 뀌며 한 시대를 같이 풍미했던 빵빵한 친구들을 생각했을 테고, 두둑한 지갑에서 세련되게 꺼내 ‘기마이’ 쓰던 빳빳한 수표를 그리워했을 테니 말이다.

복덕방에서 만난 영감 친구들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그들 간에는 그렇게 묘한 틈서리가 있었고, 그 틈서리는 100원짜리를 수백개 잃어도, 수만원어치 술을 사며 너스레를 떨어도 채워지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 틈서리는 바로 “친구가 될 수 있느냐”는 핵심적 문제였고, 그 핵심은 가치관과 취미가 같으냐는 문제였을 테니.....양측 모두 <100원빵 민화투>를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매, 그들은 늘 겉도는 가짜친구의 기분을 서로에게서 느꼈던 것이 아닐까.

민간기업에서도 은퇴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약 7년간, 나는 아버지의 취미를 만들어주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워낙 아버지를 따랐고 아버지와 모든 문제를 상의해 왔다. 아버지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상담자였고 최고의 선배였다. 최고의 친구이기도 했다.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취미를 만들어주는, 다시 말하면 낚시를 전염 또는 이양시키는 문제는 그리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당장 서너번 아버지와 함께 낚시터에 가봤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지루함에 안절부절했고, 좌대에 앉아 소주라도 한잔 마실라치면 옛날 얘기로 도배질을 하게 되니 취미전염은커녕 낚시터는 변태적 과거회상이나 신세타령의 새로운 장이 됐을 뿐이다.

아버지의 취미를 만들어주기 위한 ‘숭고’한 뜻은 있었지만 나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빨리 전염이 되거나 이양되어 취미로 정착되기는커녕 은근히 나를 낚시터에서 이탈시켜 술집 따위에서 당신의 과거타령, 신세타령 듣기만을 바랬던 아버지의 교묘한 획책에 난감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낚시를 포함해서 어떤 것을 취미로 했건 말았건 아버지의 건강은 날로 나빠지고 있었고, 하나 둘씩 영감탱이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의기소침하더니 급기야는 가벼운 치매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치매를 포함한 정신계질환의 전형적인 증세는 <기억력의 쇠퇴와 시간관념의 와해>쯤이라고 하는데, 아버지 역시 먼 과거만을 정확히 기억할 뿐, 시간이 지날수록 근년 기억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면서 요령부득의 주장과 고집이 많아져 이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에 의해 더 큰 외로움의 고독을 맛보다가 만 80세가 되던 14년전 추운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변변한 취미도 없이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낀다. 취미를 못 만들어 드렸다는 얘기만은 아니다. 기독교신앙, 인문학적 감성, 사회학적 상상력... 아버지에게서 의미있는 유산들을 수도 없이 받았음에도 나는 아버지께 아무 것도, 단 한 가지도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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