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의 날아라 고라니]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직장인이 되기 전에도 시간은 소중했다. 첫 애인과의 첫 다툼도 시간 때문이었다. 픽사의 명작 '월-E'를 보기로 한 날 약속시간이 다 되도록 애인이 연락두절이었다. 영화 시작시간 5분 전에야 방금 일어났다며 문자가 왔고, 나는 그냥 혼자 영화를 봤다. 지금 같으면 카페나 서점에서 상대를 기다렸다가 제대로 사과를 받고 감정을 풀었겠지만, 10년 전의 난 그런 처신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내 시간을 존중받지 못하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었다.

그토록 소중했던 나의 시간은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 물 쓰듯 소비당하기 시작했다. 야근수당은 남의 나라 얘기였지만 밤 10시가 넘어도 사무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회식에 끌려가거나 인사팀에서 사내문화를 개선한답시고 시행하는 프로그램 때문에 회사 사람들과 반강제로 영화를 보러 다니느라 회사 밖에서의 시간도 실종되기 일쑤였다.

ⓒ픽사베이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다 보면 각자의 이유로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첫 팀장의 퇴근 시간은 불규칙했다. 우리 팀 사무실은 사장실 바로 근처였는데 팀장은 사장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아니 그보다는 사장이 퇴근할 때 텅 빈 사무실을 보며 ‘이 팀은 일을 안 하는구먼’이라고 못마땅해할까봐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 팀장은 임원승진에서 밀리고 나서 얼마 뒤, 오랜만에 정시퇴근을 하는 나를 보며 “팀원이 저 모양이니 내가 승진을 못했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과장은 두 가지 이유로 자리를 지켰다. 야근식대를 받기 위해, 그리고 역사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살 난 아이 키우기 빠듯하다고 틈틈이 공짜저녁을 챙기는 과장을 보며 ‘자식 입장에서는 아빠가 몇 천원 아끼는 것보다 일찍 집에 오길 바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역사공부에 열중하는 사연인즉슨 이랬다. 인사부문 상무가 역사에 박식하기 때문에 술자리에서 관련 이슈가 나오면 이 때다 하고 나서서 “사실 경복궁에는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상무님!”이라고 거들기 위해서라고. 이들은 윗사람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혹은 윗사람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지금 팀장은 나인 투 식스(9 to 6) 근무시간을 철저히 지킨다. 근무시간에 빡세게 일하고 정시에 퇴근하자는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 있다. 팀장은 회사를 다니며 40대에 노무사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여가 시간에는 주로 자전거를 타거나 등산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법정근로시간 이외의 시간을 공부에 매진한 덕에 그는 회사에 의존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무기를 얻게 됐다.

사장 눈치 보는 팀장과 역사 공부하는 과장, 노무사 공부한 팀장 모두 불안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노력을 해왔다. 그들이 각자의 방식을 선택한 데에는 다양한 변수가 작용했겠지만, 셋 다 업무 능력이 출중했다는 점과 어떤 색깔의 숟가락도 물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점은 공통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앞의 두 명은 집단의 규범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키웠다는 점이고, 다른 한 사람은 회사와는 계약상의 의무를 다 하는 선에서 관계를 정립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데 쏟았다는 것이다. 앞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존심을 죽여야 하고, 후자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동조압력을 거부하는 용기와 깡이 필요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길은 없다.

약속 없는 주말에 멍하니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막연한 불안감이 슬금슬금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저 세 사람을 생각한다. 보다 측정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조직이 당연시하는 딱딱한 규범에 나를 맞추기는 싫고, 그렇다고 롤모델의 자취를 마냥 헉헉대며 따라가는 것도 찝찝하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는 작은 것 하나를 이루기에도 막대한 시간이 드는 세상에서 자랐기 때문에 앞서 세상을 산 사람들을 관찰하며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습관처럼 가늠하는지도 모른다. 직접 시도하고 착오를 겪기엔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너무나 귀하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한다. 진짜 시간낭비는 타인의 시간을 나의 시간에 있는 그대로 투영하는 짓이라고. 그러느니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늘이나 보자고 말이다.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