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오피니언타임스=이광호] 칼이 반짝인다. 피가 튄다. 쏟아지는 피를 몸으로 받아가며 사투를 벌인다. 에이즈나 간염 감염 위험성을 파악할 시간도 없다. 얇은 장갑과 마스크는 언제 뚫릴지 모른다. 그렇다고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다. 환자의 숨을 이승에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두기 위해 의사는 위험을 무릅쓴다. 과로는 일상이다. 얼마 전에도 설 연휴에도 근무 중이던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순직하는 일이 있었다. 의사들은 환자들의 삶을 붙잡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그만큼 의사들의 일상은 위태로워져 간다. 외상센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다.

그래서일까. 이국종 교수는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순신이 정치적 모함으로 조정의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등 왜군과의 전쟁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이순신의 흔들리는 내면을 그려낸 소설이다.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고통을 담아낸다. 또한 조선과 일본으로 단순화 된 전쟁이 아니라 명나라를 포함한 국내외 정치, 임금의 전쟁, 이순신의 전쟁, 백성들의 전쟁 등 다양한 전쟁의 양상을 다룬다.

ⓒ픽사베이

이국종 교수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싸움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환자를 구하며 외부의 상황들도 감당해야 했다. 환자를 살릴수록 병원의 적자가 커져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으며, 인원 부족으로 과중한 노동과 수면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석해균 선장과 탈북 병사를 살려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각종 논란과 비난이 따라왔다. 정치에 입문하려고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수술실에서 환자의 목숨을 건 전쟁을 벌이는 동시에 이국종이라는 상징성, 혹은 권역외상센터 설치 및 지원 사업에서 창출되는 이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시스템이 없는 사회엔 개인의 희생이 따른다. 이순신은 전투에서의 부상과 조정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왜군과의 전투에 열중한다. 이국종 교수 또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이며, 세월호 현장에서 어깨를 부상당하기도 했다. 과로로 인한 부정맥 악화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환자를 찾는다.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동료 교수의 말에 '평소에도 만성병으로 인한 오랜 투병보다는 업무 중 과로사가 낫다고 생각했다. 중증외상이나 심혈관 질환으로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 찾아오는 죽음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골든아워1』)'던 속마음을 책을 통해 밝힌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다 과로사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병을 앓다 죽는 것보다 환자를 치료하다 죽는 게 낫다는 그의 속마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전쟁터의 장수는 전투 중에 죽는 것을 명예롭게 여긴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 자연사일 것이다.'라며 전쟁에서 죽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긴다.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 해군이 후퇴해 '자연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을 직접 맞이하러 간다. 임금이 내린 면사첩(사형을 면함을 보증하는 문서) 불태우고 후퇴하는 일본군의 뒤를 쫓아 노량에서 전투를 벌이다 적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삼도수군통제사에게 어울리는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장면이다. 이국종 교수도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다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무감각해져야 한다. 부러진 뼈, 몸 밖으로 튀어나온 장기, 쏟아지는 피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판단력을 잃는다면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투중인 장수에게는 아군 병사와 백성들을 살릴 방법이고, 수술중인 의사에게는 사경을 헤매는 환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수치화, 통계화된 죽음에서는 죽음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1년에 사망하는 사람이 28만명이 넘는다. 하루에 약 760명이다. 그러나 칼끝에서 느껴지는 죽음은 분명 개별적이다. 저마다의 표정을 가진 죽음의 개별성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늘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난 그 개별적인 죽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골든아워1』)'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묵묵히 칼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기를‘(『칼의 노래』)' 염원하며 묵묵히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삶의 무의미함과 존재의 위태로움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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