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연의 하의 답장]

[오피니언타임스=이하연] 한 달 전부터 피아노를 배운다. 소소한 성취감을 느껴보려는 발악이다. 악보도 볼 줄 모르고, 감히 피아노 위에 양 손을 올려놓는 상상도 못했던 나였다. 매일 매일의 피아노 연습은 확실히 성취감을 준다. 한 발자국만 나아가도 실력 상승이다. 두 발자국을 나아가면 일취월장이란 평을 받는다. 그런 재미에 빠져 지금은 보란 듯이 양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춘다. 페달을 밟는 건 덤이다.

ⓒ픽사베이

처음 피아노를 배우고자 결심했던 때를 떠올려보면 무기력 상태에 빠져있었다. 분명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라는 사람의 쓸모를 잊기 직전이었다.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친구들과 놀아도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살겠다고 동아줄처럼 잡았던 게 악기였다. 새로운 도전과 배움에서 희열을 얻는 내 성향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나는 모르는 게 있으면 모른다고 곧잘 말하는 편이다. 모르는 걸 알게 됐을 때 내 눈앞엔 번쩍이는 환희가 아른거린다.

그 길로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갔다. 학원 매니저는 내게 좋아하는 피아노곡은 무엇인지, 클래식과 재즈 중 어떤 음악을 선호하는지를 물어봤다. 피아노의 '피'자도 모르는 내가 피아노에 대한 기호 따위를 갖고 있을 턱이 있나. 악보 위를 떠다니는 콩나물의 멜로디라도 알아야 취향이 생기지 않겠는가. 새하얀 백지 위에 음표가 그려지고 귀에 다가와 들리기를 바랐다. 마음이 안정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연습실마다 냄새와 분위기가 다르다. 첫 날은 노란 냄새가 풍기는 방에 들어갔는데, 매니저의 말에 의하면 피아노의 노란 분위기가 온 방에 배었다고 했다. 아름다운 표현이었다. 차츰 악보를 읽어가면서, 건반을 두드려가면서 각 연습실과 나의 궁합을 알아가란 말도 덧붙였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은 9번과 13번방을 좋아하게 됐다. 9번은 가장 구석에 있어서 좋고, 13번은 가장 커서 좋다. 각 방의 냄새를 알기까진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방의 위치와 크기는 나라는 사람이 본래 가진, 혹은 꽤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좋아해온 취향이다. 규모가 큰 카페, 식당, 강의실의 후미진 자리를 선호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그곳에 앉아있다. 큰 장소의 고립된 공간에서 안정을 느끼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피아노 실력은 늘었지만 피아노 취향은 여전히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기력했던 마음엔 바람이 불었고, 숨만 쉬어도 흔들렸던 멘탈은 가까스로 진정됐다. 피아노가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주어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게 됐다. 사실, 이것으로 족하다.

만족스럽지만 피아노는 계속 치려고 한다. “좋아하는 피아노곡이 뭐예요?”란 물음에 대답을 하고 싶고, “어떤 분위기의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작은 성취라도 이루려고 시작했던 거였는데 생각보다 판이 커졌다. 피아노와 이렇게까지 진지한 인연이 될 줄이야. 연습실을 가득 메우는 피아노 소리는 설렘을 준다. 88개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악보를 읽을수록, 맨 오른쪽 페달과 발의 합이 맞을수록 취향은 천천히 내게 스며든다. 

이하연

얼토당토하면서 의미가 담긴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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