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3.1 운동 100주년 기념일이 막 지났다. 100년이라는 숫자가 갖는 무게감으로 인해서인지 자주·독립의 정신을 기리는 각종 행사가 있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고, 정부 또한 각별한 준비를 바탕으로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발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천명한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국가적 행사에서 아직까지도 친일잔재 청산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제 이 문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친일잔재 청산은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됐으나,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의 특별경찰대에 의해 강제 해산됨으로써 친일잔재 청산의 첫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것도 친일파들에 의해서 그리된 것이었으니 통탄해마지 않을 일이었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친일잔재 청산을 둘러싼 공방이 계속돼 왔지만 여전히 미진한 상태에 있다. 이 말은 비단 친일 부역을 한 친일파 내지 반민족주의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많은 인사들이 친일파로 분류되는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기에 더 이상 이런 분류 작업을 하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필자는 친일잔재의 청산은 우리의 의식(意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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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국인 대부분이 파편화된 의식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 선진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봉건의식, 식민지의식 및 분단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했던 봉건의식의 잔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집단무의식에 남아있어 특권 남용과 지대추구행위를 당연시 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있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이른바 '갑질'은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재벌총수 일가만이 아니라 누구든 그런 위치에 있으면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몫을 요구하는 지대추구행위 또한 봉건의식에 기인한다. 이런 의식은 진정한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식민지의식은 어떠한가? 36년의 일제 강점기간은 한 세대를 넘는 긴 기간이다. 일제 강점의 공과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이 기간 동안 한국의 잠재력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 문제와 관련해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일제에 의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이나 근대적 교육제도 실시 등과 관련된 공과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의식이 한국인의 잠재력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식민지의식은 우리에게 과도한 열등감과 기회주의적 성향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이 시점에도 이런 성향은 밈(meme), 즉 문화적 유전자의 일부가 되어 여전히 우리의 집단무의식에 남아있다.

분단의식 또한 여전히 우리에게 파편화된 의식을 강요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의식은 끊임없이 우리를 ‘내 편’과 ‘네 편’, ‘적’과 ‘동지’로 나누도록 강요함으로써 사회통합과 협력을 근원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나아가 분단의식은 가짜 보수와 가짜 진보가 득세하는 발판을 제공함으로써 진정한 보수와 진정한 진보를 구축(驅逐)하고 있다. 이른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현상을 유발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지금도 분단의식을 조장해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도처에 포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내심으로는 분단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횡설수설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 질환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무의식에 깊이 박혀 있으면서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봉건의식, 식민지의식 및 분단의식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가운데 필자는 이 시점에서는 식민지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식민지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정인이나 특정세력을 친일파로 분류해 단죄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는 식민지의식이라는 망령(妄靈)을 떨쳐내는 것이 급선무이다. 식민지의식에 기인한 과도한 열등감과 사회 해체적인 기회주의 성향, 이 모두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열등감은 한국인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의 말대로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는 병적 현상이 아니라 개개인에 있어 상대적으로 취약한 모든 특성의 복합체(complex)일 뿐이다. 예컨대 이성이 발달한 사람은 감성적인 면에서 열등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미모의 여성이 지적인 면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이런 예에 해당된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열등감은 그 이상이다.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 상태에서 느끼는 일종의 자학(自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일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조선인이 열등하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일제 강점을 정당화하려 했다. 따라서 이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잠재력을 믿고 이를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과 한국의 현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식민지의식을 극복하는 데 큰 장애요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예컨대 일본에 대해서는 무조건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습관이 고착된 나머지 한일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이성적 사유에 입각한 대응이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한일 축구 대항전에서 승리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식민지의식을 극복하고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의 진정어린 사과를 요구해도 끝까지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본 정부가 틈만 나면 독도 문제를 거론하면서 우리 심기를 건드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본의 파워엘리트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얕잡아보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그들이 그리 행동하도록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 있다. 일본 정부의 무례한 반응에 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우리에게 있다.

열등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지금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의 현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자료가 있다. 다름 아니라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에 관한 자료다. 2018년 기준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은 총 26명인데, 여기에 일본계를 더하면 총 29명이다. 이 가운데 노벨 물리학상이 11명, 화학상이 7명, 생리·의학상이 5명, 문학상이 3명, 평화상이 1명이다. 일본보다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뿐이며, 2000년대 들어와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는 노벨 평화상 1명만 있을 뿐이니 이 점에서 일본과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인 수상자 대부분이 물리학, 화학 및 생리·의학 분야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이런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면서 과학 발전과 인류 문명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세계적 관점에서 아무 것도 기여하지 못하면서 고작 한일 축구대항전 승리에서 대리만족을 얻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정신 상태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 물론 노벨상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 분야에서 일본이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된 과학적·문화적 배경이다. 일본인들이 높은 독서 열기를 바탕으로 지식을 숭상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이를 계승·발전시켜온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한국 사회에 창조성(creativity)을 존중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사회에 창조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문화적인 강국으로 거듭난다면, 일본은 더 이상 우리를 얕잡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가능성이 있으며, 독도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각인된 식민지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다.

다음 식민지의식에서 비롯된 기회주의적 성향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기회주의적 성향이 잠재돼 있다. 이는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생존 기술로 터득한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용기 있는 사람들은 전면에 나서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향이 있는 반면, 비겁한 사람들은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면서 목숨을 부지해왔다. 이것이 면면히 내려온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다. 따라서 누구도 기회주의적 행동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자격은 없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는 예외였다. 단순히 유리한 기회를 선점한다는 차원을 넘어 능력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풍토가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생태계가 파괴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자연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파괴된 생태계가 다시 복원되는 내재적인 성향이 있으나 인간 사회는 그렇지 않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사회에는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해야 득세한다는 고정관념이 뿌리내렸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곳곳에 만연하고 있는데, 특히 공적 영역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풍토는 기회주의적 성향이 오히려 대접받는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개인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원칙을 버리고 말을 바꿔도 별 문제가 없는 사회에서는 기회주의가 득세하게 돼 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런 성향이 우대받는 풍토가 조성됐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필자는 이를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일본은 대단한 본보기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 명치유신 초기에 활약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교육과 문화면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경제면에서 근대 일본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시부사와는 500여 개에 달하는 기업의 설립 과정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기업들을 대부분 사회에 환원했으며 일본 경제제도의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시부사와는 말년에 자신의 경영철학을 담은 저서 『논어와 주판』을 통해 공익을 위한 기업 경영의 정도(正道)를 밝혔다. 시부사와가 이 책에서 인용했던 『논어』의 다음 구절은 지금도 우리 모두 유념해야 할 것이다.

• 부귀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부귀를 누리지 말아야 한다. 빈천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버리지 말아야 한다.

•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 데도 가난하고 비천하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고, 나라에 올바른 도가 없는데 부유하고 고귀하다면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정신인가?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서는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발견할 수 없다. 모름지기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한다. 시부사와는 기업 경영에서 개인적인 이기심의 차원을 넘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동선(common good)의 추구를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했고 후대 일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일본이 여전히 강한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정신이 일본인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국가의 주요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사회적·문화적 풍토를 조성하는 것 또한 식민지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친일잔재를 청산할 수 있다.

우리는 국가적 기념일을 맞이해 늘 정부 주도로 대단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거창한 수사(修辭)로 가득 찬 선언문을 낭독한 후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면 만사형통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요식행위로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그 동안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진정 마음 깊은 곳에서 친일잔재 청산을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각자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서 창조적인 사고를 장려하고 공동선을 육성하는 데 기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1세대 사회학자로서 은퇴 후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의 의식 연구에 몰두했던 이만갑 교수가 저서 『의식에 대한 사회학자의 도전』에 남긴 다음 구절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 뇌의 신경망 회로에 변화가 생길 정도로 깊이 고뇌하지 않으면 의식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친일잔재 청산은 기대 난망(難望)이기 때문이다.

“좋은 말, 좋은 글에 접하면 적어도 잠시 동안은 정신을 맑고 풍부하게 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과 글은 항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상호작용과정에서 체험과 사색으로 다져져서 비단 신피질의 영역에서 지적 논리의 전개로만 맴도는 것이 아니고, 변연계의 영역에서 정서적인 금선을 울리고, 더 깊이 들어가서 생명의 의욕을 분출케 하는 뇌간의 핵심에 도달함으로써 그의 심층적 의식에 연결되지 않으면 정신의 혁신을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시장경제의 통합적 이해> 외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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