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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도 스펙이다[고라니의 날아라 고라니]
고라니 | 승인 2019.03.20 11:40

[청년칼럼=고라니] 청년실업 문제는 내가 취업준비를 하던 2015년에도 최악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의 선배가 취업준비를 할 때도, 그 선배의 선배가 취업준비를 할 때도 청년실업률은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 함께 고공행진 했다고 한다. 그 덕에 블라인드 채용이나 공공기관 지역인재 채용할당제와 같이 취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이슈들 말고도 유가 급락, 소비심리 하락, 심지어 재벌 총수의 실형 선고까지 모든 소식이 내 일자리를 빼앗는 비보로 느껴지는 예민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엔가 도서관에서 인적성 문제를 풀다 화장실에 갔는데 소변기 위에 붙어 있는 동아리 홍보지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최대 연합 봉사동아리라는 거창한 소개로 시작해 ‘끈끈한 인적 네트워크’, ‘균형 잡힌 남녀 비율’, ‘봉사시간 인정’과 같은 이야기로 이어지다 ‘봉사도 스펙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끝나 있었다. 그 때의 난 염불보다 잿밥 얘기만 주구장창 써 놓은 이 한심한 홍보지를 욕하지 못했다. 나 역시 스무 살부터 스물여덟까지 해왔던 봉사활동 경험을 자소서와 면접을 위한 스토리텔링 소재로 충실히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애초에 어떤 목적으로 그 시간을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200시간에 달하는 봉사 실적 가운데 내가 회사에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건덕지가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했다. 손이 불편한 장애학생을 위한 강의 대필 봉사와 시골마을에서 지적장애인들과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한 경험은 협력과 팀워크 역량을 증명하는 소재로 활용됐고, 난민 캠프에서 보낸 시간은 나와 자라온 환경이 다른 동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그러니까 꼰대들의 그 어떤 부당한 지시에도 입 다물고 있겠다는 다짐을 은밀하게 포장하는 데 사용됐다.

봉사활동을 하며 실제로 깨달은 것들, 예를 들면 세상에는 선천적인 불편함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과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최소한의 의무라는 것,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도 최소한 그 옆에 같이 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봉사활동의 가치라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기업은 그런 ‘속 얘기’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고 정의되어 있는 ‘봉사’를 ‘나’를 위한 취업의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었다.

자소서에서 일관되게 전달하려고 한 메시지는 이런 식이었다. “첫 장에서 봐서 알겠지만 난 성실히 학점을 따고 영어점수를 만들었다. 당신들이 좋아하는 경영학도 복수전공했다. 이렇게 내 앞가림하는 와중에 봉사활동까지 하면서 이토록 값진 것들을 얻어냈다. 날 뽑아주면 당신네 회사에서도 내 업무 외적으로 더 봉사해줄게.” 봉사활동은 ‘쓸데없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됐다. 시간이 투자된 모든 것에는 만져지는 결과물(output)이 있어야 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취미들조차 일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검증된 방법이 마련되어 있다는 식으로 소개해야 했다.

그나마 봉사활동은 경력 없는 신입 구직자들이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소중한 소재거리다. 문제는 취업의 문이 좁아지며 정량적인 스펙뿐만 아니라 정성적인 부분도 차별화가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나만 해도 자소서에서 가장 먼저 활용한 봉사활동 경험은 며칠 되지도 않았던 해외봉사였다. 자칭 자소서 대필 전문가라는 이들이 대거 등장해 자소서 작성방식도 평준화되는 판에 이젠 경험으로부터 어떤 가치를 얻었는지 이전에 경험 자체가 평가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리고 성실한 대학생활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경험들이 당연하게 요구됨에 따라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자본이 자식의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이 보다 내밀하게 확장됐다.

그 자리에 원래 있어야 할 사람의 인생을 뒤틀어버리고 자기 자식들을 꽂아 넣는 빌어먹을 채용비리 이야기가 아니다. 취업을 위한 경험의 질이 자본력에 따라 촘촘하게 위계화되며 경력 같은 신입이 체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다. 돈 주고 사지 못할 경험은 없다. 기업이 싫어하는 ‘공백기’에 대한 알리바이도 만들면 그만이다. 해외로 장기 어학연수나 봉사활동을 가거나, 남들이 인턴 경험 쌓을 때 스타트업을 경영하며 창업 경험이라도 추가하면 된다. 공무원과 공기업 준비에 취준생들이 몰리는 이유는 안정성 때문만이 아니다. ‘필기시험’이라는, 노력으로 넘을 수 있는 공정한 허들이 남아 있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

4년 전 도서관 화장실에서 봤던 그 봉사동아리가 그 때의 포지셔닝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면 지금쯤 서울이 아닌 전국 최대 동아리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본연의 목적은 뒷전이고 대학생을 ‘고객’으로, 봉사는 동아리가 제공하는 ‘서비스’ 정도로 취급하는 곳이었지만 왜 그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개운치 않다. 그들의 메시지가 지금 대학생들의 시급한 니즈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은 분명하고, 나 역시 ‘쓸모’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까. 물론 가끔 기업에서 사회공헌 활동이랍시고 사장이 친히 김장을 담그거나, 연탄을 배달하는 사진을 찍어 대단한 사랑이라도 나눈 양 대대적으로 보도자료를 뿌리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봉사활동 경험을 자소서에 조금 활용한 것이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때도 역대 최악의 취업 한파 아니었나. [논객닷컴]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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