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논객칼럼=이동순] 하늘은 인간에게 많은 재주를 베풀어주었지만 대개 한 가지 부문에만 특별한 솜씨를 주셨지요. 그런데 이 음악 판에서 혼자 각양각색의 다양한 재능을 한 몸에 지니고 종횡무진 바람찬 세월을 앞장서 헤쳐 갔던 대중음악인이 있었습니다. 한국대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작사와 작곡과 노래를 겸했던 만능 대중음악인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우선 당장 손꼽을 수 있는 인물로는 천재음악가 김해송(金海松, 1910~?) 정도가 있겠지요.

여기에다 한 사람을 더 들라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김용환(金龍煥, 1909~1949)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면은 하나같이 작곡과 가창을 겸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뛰어난 독보성(獨步性)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 한국대중음악사에서 매우 희귀한 천재음악가였던 김용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김용환 Ⓒ이동순

뛰어난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만능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김용환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습니다. 원래 기독교 집안이었으므로 예수의 제자인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의 이름을 따서 용환이 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형제들로는 가수로 출세했던 아우 김정구(金貞九, 1916~1998), 피아니스트였던 아우 김정현(金貞賢, 1920~1987), 소프라노 가수였던 누이동생 김안라(金安羅, 1914~1974) 등 원산의 출중한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김용환의 아내 정재덕(鄭載德, ?~1950) 또한 원산 출생으로 가수가 되었으므로 가히 명문 음악가 집안이라 할 만 하지요. 4남매와 형수가 원산 시절, 가족연주단을 조직해서 동해안 길로 남쪽으로 내려와서 금강산 온정리 마을까지 두루 다녀가며 마을마다 공연을 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오기도 합니다.

그들 형제는 교회음악을 통해서 음악적 재능을 키워간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마을과 교회에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작곡과 가창은 물론이요,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을 뽐내기도 했고, 온갖 악기 연주에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야말로 무불통지(無不通知). 노래는 언제나 툭 트인 목소리로 걸쭉하고도 능청스러우며 시원시원한 서민적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체격은 남성적 풍모에 눈이 부리부리하며 완강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원래 김용환은 원산지역의 소규모 연극조직이었던 ‘동방예술단(일명 조선연극공장)‘에서 연극배우 겸 가수로 출발했습니다. 작곡가로서 맨 처음 데뷔한 것은 조선일보의 가사모집에서 신민요 '두만강 뱃사공'이 당선되고부터입니다. 이 경력이 바탕이 되어 1932년 근대식 레코드회사들의 조선 진출에 따라 서울의 포리돌레코드사에서 전속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숨 쉬는 부두’ ‘낙동강’ ‘젊은이의 봄’ 등으로 급격히 인기를 얻어갔는데 주로 신민요풍 노래를 능숙하게 잘 불러서 대중적 각인을 얻었습니다.

(왼쪽부터) 김용환의 누이동생이었던 가수 김안라, 아내였던 가수 정재덕, 김용환의 아우였던 가수 김정구 Ⓒ이동순

오늘 날 노래 이름만 들어도 그 시절이 기억되는 '구십리 고개' '노다지 타령' '모던 관상쟁이' '낙화유수 호텔' '이 꼴 저 꼴' '장모님전 항의' 등의 노래가 바로 김용환이 히트시킨 작품들입니다. 김용환의 노래를 귀 기울여 가만히 듣노라면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꾼의 소탈하고도 호방한 창법에 서민적 삶의 정겹고 구수한 향취마저 느껴집니다. 뭐랄까, 민중적 넉살이랄까요? 그 넉살도 노래의 바탕에 따뜻한 슬픔과 연민이 살포시 깔려 있는 여유로움의 과시이지요. 나라의 주권이 이민족에게 빼앗겨 유린과 압박을 당하던 시기에서 이러한 창법의 효과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성을 지켜가는 일에 매우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김용환의 또 다른 재능으로는 뛰어난 신진가수를 발굴하는 남다른 재주와 안목을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가수 이화자(李花子, 1918~1950, 본명 李願載)의 발굴입니다. 1935년 여름, 김용환은 경기도 부평의 어느 술집에 노래 잘 부르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달려가서 실력을 테스트했습니다. 요즘말로 오디션이지요. 창밖에 부슬비가 주룩주룩 내려 낙숫물 소리가 들리는 깊은 밤, 술집에서 이화자가 부르는 기막힌 '노랫가락'을 듣고 탄복한 김용환은 일단 그녀를 발탁하여 일정기간 연습을 시킨 다음, 마침내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꼴망태 목동'과 '님전 화풀이'를 발표시키며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게 합니다. 물론 김용환이 김영파(金鈴波)란 예명으로 곡을 만들어 이화자에게 주었지요, 1939년은 김용환에게 있어서 가히 최고의 해였습니다. '어머님전 상백'(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이화자 노래)이 발표되어 엄청난 인기 반열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복모구구 무임하성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피눈물로 먹을 갈어 하소연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로 어머님 이별하고
꽃피는 아침이나 새 우는 저녁에
가슴 치며 탄식하나요

-'어머님전 상백(上白)' 1, 2절

김용환의 노래'낙동강'신보소개

험한 세월의 칼바람과 거친 눈보라 앞에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 곁을 떠나 멀리 남양군도로, 중국 땅으로, 혹은 시베리아로 끌려가야만 했던 식민지 압제하의 청년들은 피눈물로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특히 조선여자정신대(朝鮮女子挺身隊)란 이름으로 강압 속에 끌려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당했던 이 땅의 처녀들, 지원병(志願兵)이란 이름으로 붙들려간 청년학생들, 징용(徵用)과 보국대(報國隊)란 이름으로 끌려갔던 모든 한국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순박하게 살아온 그들이 왜 그런 기막힌 형벌을 뒤집어써야만 했던 것입니까? 누가 그들의 삶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것인지요?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의 여러 가요시도 절창이 많지만 김용환의 이 구슬픈 페이소스의 작품은 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전체한국인들의 가슴을 마구 도려내고 눈에서는 사뭇 뜨거운 눈물을 저절로 쏟게 만들었습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작곡가로 활동할 때의 김용환은 김영파, 김탄포(金灘浦), 조자룡(趙子龍)이란 예명을 함께 번갈아가며 사용했습니다.

김용환이 가수로서의 재주를 듬뿍 뽐내고 있는 작품으로는 '낙화유수 호텔'을 비롯한 '모던 관상쟁이', '술 취한 진서방', '눈깔 먼 노다지', '복덕장사', '장모님전 항의' 등과 같은 만요풍(漫謠風)의 노래들입니다. 그밖에도 ‘님 전 화풀이’ ‘꼴망태 목동’ ‘세기말의 노래’ ‘구십 리 고개’ ‘노다지 타령’ ‘아주까리 선창’ 등 작곡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들도 들을 만합니다. ‘장기타령’ ‘정어리타령’ ‘흥야라타령’ 등의 노래는 김용환의 이미지를 신민요의 달인으로 확정시켜 주었습니다. 1935년 잡지 ‘삼천리’가 실시했던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 김용환은 채규엽(蔡奎燁, 1906~1949)의 뒤를 위어 당당히 2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뒤로는 고복수(高福壽, 1911~1972),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최남용(崔南鏞, 1910~1970) 등이 3~5위를 차지했으니 당시 김용환의 대중적 인기가 어느 정도였던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에서 2위를 기록한 김용환 Ⓒ이동순

김용환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우 김정구가 형님의 노래를 그대로 이어받아 음반을 내거나 무대에서 즐겨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심히 들어보면 형제간의 창법이나 음색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대중들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마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짙은 서민적 감성과 체취는 아우가 형을 따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처럼 만요(漫謠)란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런 분위기의 노래를 말합니다.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웃음 뒤에는 대개 눈물의 현실, 모순과 부조리의 세태를 고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지요.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요작품 '낙화유수 호텔'은 한국의 만요 중에서도 매우 수준 높은 작품에 속합니다.

우리 옆방 음악가 신구잡가 음악가
머리는 상고머리 알록달록 주근깨
으스름 가스불에 바요링을 맞추어
(대사) 자 창부타령 노랫가락 개성난봉가
자 뭐든지 없는 거 빼놓곤 다 있습니다
에 또 눈물 콧물 막 쏟아지는 ‘낙화유수’ ‘세 동무’
자 십 전입니다 단돈 십 전 십 전
싸구려 싸구려 창가 책이 싸구려
창가 책이 싸구려

우리 웃방 변사님 무성영화 변사님
철 늦은 맥고모에 카라 없는 와이샤쓰
캄캄한 스테지에 노랑목을 뽑아서
(대사)아침부터 나리는 눈이 저녁이 되어서는 함박꽃이 쏟아진다.
산다손으로 말미암아 거짓결혼에 희생이 되어 생의 파멸을 당한 안나는
주인 파드레드로부터 나가라는 선고를 받앗다.
싸구려 싸구려 무성영화 싸구려 무성영화 싸구려

우리 앞방 대학생 밤엿장수 대학생
쭈그렁 금단추에 울퉁불퉁 여드름
쓸쓸한 밤거리에 엿목판을 메고서
(대사)싸구려 싸구려 밤엿이 싸구려
수수엿 깨엿 콩엿 개성인삼엿 북청검은엿
시어머니 몰래 이불 속에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후추양념에 밤엿 어으아 밤엿
싸구려 싸구려 대추엿이 싸구려 대추엿이 싸구려

--만요 '낙화유수 호텔' 전문

'낙화유수호텔', '술취한 진서방' 등의 신보소개

밤 깊은 길거리에서 카바이트 불빛을 밝혀놓고 노래책을 팔고 있는 밤거리 서적상의 광경이 그림처럼 1절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 노점상 청년의 외모는 모발을 3cm 정도로 짧게 깎고 얼굴에는 온통 주근깨투성이인데 별명이 음악가로 불립니다. 조명은 타들어가는 소리가 쏴하고 요란하게 들리는 카바이트 불을 환히 밝히고 있네요. 청년은 바이올린 연주를 하다가 악기를 내려놓고 혼자서 외칩니다. 단돈 십전짜리 창가 책 ‘신구잡가(新舊雜歌)’를 목청 높여 판촉(販促)해보지만 지나는 행인들은 별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낙화유수’ ‘세 동무’ 같은 1920년대 무성영화 주제가들의 제목도 보입니다.

2절의 주인공은 낡은 무성영화 필름을 들고 다니며 그것으로 마을주민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틀어주고 약간의 입장료를 받는 무명변사입니다. 그의 초라한 외모를 어디 한번 보실까요? 찬바람은 불어오는데 이 무명변사는 보기에도 썰렁해 보이는 철지난 보릿짚 모자를 쓰고, 깃이 아예 없는 얇은 여름용 와이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습니다. 관객도 몇 되지 않는 노천극장에서 변사는 저 혼자 쓸쓸하고도 외로운 반향의 울림으로 구성진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넉살좋게 엮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작품 전반에서 거의 절규나 악다구니의 애달픈 음색으로 들려옵니다.

3절에서의 주인공은 깊은 밤 뒷골목을 굽이굽이 헤매 다니며 엿을 팔아 학비를 스스로 보조하는 가련한 고학생입니다. 낡은 금단추가 달려있는 대학생 교복을 입고 있지만 얼굴은 아직 여드름투성이입니다. 그 학생은 엿목판을 가슴에 둘러메고 혼자 외칩니다. 그 외침 속에는 당시 서민들이 간식으로 즐기던 온갖 엿의 종류들이 다양하게 떠올려집니다. 후추를 가미해서 약간 매콤한 맛이 나는 밤엿, 깨엿, 개성인삼엿, 북청검은엿, 달콤한 대추엿 따위가 그 품목들입니다. 특히 밤엿을 해설하면서 고학생은 신혼부부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둘러쓴 채로 같이 정답게 나누어 먹는데, 안방의 시어머니가 혹시 알아차릴까봐 숨을 죽이며 몰래 먹는 광경이 코믹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지만 각 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외침에는 반향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찬바람 부는 밤길거리의 뜨내기들입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면 땅바닥에 펼쳐놓았던 소품들을 일제히 걷고 정리한 뒤 터벅터벅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그 숙소란 것이 아주 저렴하기 짝이 없는 여인숙입니다. 거리의 음악가로 불리는 노천 서적상, 무성영화를 틀어주는 무명변사, 엿을 팔러 다니는 고학생 등 셋이 모이는 여인숙에서 그들은 각각 앞방, 윗방, 옆방으로 나누어 들어갑니다. 이미 며칠째 장기투숙 중입니다. 장사 실적이 별반 좋지 않으니 당장 숙박비를 지불하기에도 벅찹니다. 이튿날 끼니마저도 걱정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전면에는 그들 특유의 민중적 낙천성이 느껴집니다. 어떤 절박한 위기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황소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갑니다. 아주 값싼 여인숙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숙소를 ‘낙화유수 호텔’이라고 부릅니다. ‘낙화유수’는 무성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떠돌이 유랑자의 신세를 상징합니다. 비록 여인숙이지만 호텔이라고 부르는 그 삶의 넉살과 여유에 대해서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겠습니다.

작품 전체에서는 1930년대 후반, 식민지사회 밑바닥 인생들의 구체적 삶이 실감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바람 찬 밤거리에서 외치는 그들의 생생한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시대와 사회적 환경의 전형적 풍물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담아낸 노래나 문학작품이 어디 있으리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런 점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 노래의 가창과 대사 일체를 김용환은 자신만이 지닌 특유의 독보적 재능으로 너끈히 소화시켜 내었습니다. 이후 김용환은 '가거라 초립동'를 또 한 차례 크게 히트시킨 다음, 1949년 40세를 일기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아까운 나이에 너무도 일찍 서둘러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한 천재적 대중음악인의 이름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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