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연의 하의 답장]

[청년칼럼=이하연] 밥 먹고 산책하는 버릇이 있다. 소화시키기 위해서라는 나름의 이유는 있지만 소화기능이 나쁜 편은 아니니 사실상 아무 목적이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배회할 뿐이다. 노래를 듣거나 흥얼거리지 않는다. 파편 조각처럼 흩어진 생각을 끼워 맞추지도 않는다. 문득 과거를 떠올리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회상이 민망하면 머리를 콩 쥐어박을 때도 있고, 망상이 지나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때도 있다. 그러다 시간이 다 되면 조용히 현실로 돌아온다.

아침 산책은 목적은 없지만 목적지는 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걷는데 20분이 걸린다. 버스를 타도되지만 아침밥 든든히 먹었겠다, 이왕이면 걸어간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림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들떴었지. 새로 바꾼 헤어스타일이 워낙 마음에 들어 나도 모르게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거리를 질주했다. 분명 회사 동기들이 한 번씩 머리를 만져볼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몸을 배배 꼬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침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다 지하철역에 도착해 카드를 찍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정기권을 산다는 걸 깜빡했다.

점심 산책 땐 혼자가 아니다. 학교 다닐 땐 늘 혼자였었는데. 뒤늦게 복학하는 바람에 동기도, 친구도 없었다. 밥을 먹고 늘 혼자서 공원을 돌고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나 회사에 오니 동기들이 넘쳐난다. 그중 도시락을 싸오는 동기 3명이 나의 산책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여줬다. 한 달 넘는 동안 매일같이 점심 먹고 회사 옥상을 돌았고, 앞으로도 돌 예정이다.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다가도 몰아치는 바람에 땅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웅장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하늘도 쳐다보는데, 비행기가 많이도 지나가더라. 타고 싶게.

저녁 산책은 운동과 산책의 경계에 있다. 확실히 아침, 점심보다 걷는 속도가 빠르고 움직임이 많다. 오늘은 특히 다리를 많이 썼는데,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일을 하다 보니 다리가 무거웠다. 다리가 내 몸의 일부가 아니라 끌고 다녀야만 하는 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발차기도 좀 하고 전봇대에 다리를 올려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 살을 빼겠다며 뒤따라오던 엄마도 다리 스트레칭을 했다. 어두컴컴한 골목을 돌다보면 괜히 울적해지거나 평화로움에 갑자기 행복해질 때도 있다. 우울할 때면 ‘난 왜 이 시간에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기쁠 때면 ‘이 시간에 혼자서 거리를 돌다니! 난 행운아야!’란 생각이 든다. 원인이 결과를 만드는 건지, 결과가 원인을 만드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산책시간 만큼은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듯하다. 완전히 낯선 세계. 어제와 같은 길일지라도 처음 보는 길처럼 느껴진다. 분명 어제 거닐었던 거리인데 자칫하면 길을 잃을 정도로 낯설다. 산책이 끝나면 익숙한 현실 공간이 피부로 느껴진다. ‘아, 내가 지금 지옥철 안에 있구나’ ‘내 눈앞에 있는 물체는 컴퓨터고 나는 열심히 뭔가를 두드리고 있구나’

산책은 내게 시간과 세계를 가르는 힘을 선사한다. 

이하연

얼토당토하면서 의미가 담긴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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