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의 관찰일기]

[청년칼럼=우디] 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오래 전이었다. 다만 언제 말할지 망설여졌다. 적어도 1년은 참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도 해볼만큼 해봤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통근버스를 버티고 푹푹 꺾이는 무릎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무너지는 건 정말 한 순간이었다. 어쩌다가 거래처에서 하는 내 뒷담화를 실제로 듣게 됐고, 사수는 3개월 된 신입 부하직원을 두고 퇴사했다. 울고 싶었지만 선배들은 내게 약하다고 했다.

회사가 있던 6층 비상구 계단 난간에 상반신을 걸치고 여기서 떨어질까,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면 구석으로 숨었다가 다시 난간 위에 몸을 걸쳤다. 사람들이 죽도록 싫었다. 문득 여기서 떨어지면 죽지 못하고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부모님께 폐가 되겠지.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고 일단 퇴사하자, 라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끔찍했던 그 날은 화요일이었고 한달의 마지막 주였다. 금요일은 31일이었고 회사는 말일에 급여를 줬다. 수요일에 출근하자마자 부장에게 퇴사하겠다고 말했고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31일 조금 이른 시간에 마지막 퇴근을 하면서 나는 “나가떨어져 버렸네”라고 중얼거렸다. 오랜 망설임이 무색할만큼 4일 만에 일어난 큰 변화였다.

Ⓒ픽사베이

“뭐가 그렇게 서러웠던 거야?”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는 그렇게 물었다. 대답을 망설이던 나에게 친구는 재차 물어봤다. 네 글, 왜 그렇게 울고 있는 건데. 회사 다닐 때 써놨던 내 글을 뒤늦게 읽은 친구가 말했다. 울었나, 서러웠나. 애써 외면했던 감정을 글은 말하고 있었다.

퇴사를 한 나는 매일 잠을 잤다. 14시간~16시간씩. 아무도 몰랐다. 그게 이상한 수면 습관인지. 부모님도 그냥 게으른 내가 깊이 잔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녔던 시기가 조금 힘들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신 거다. 하지만 계속 졸렸다. 주위에선 기간을 정해서 쉬고 다시 일어나라고 격려해줬지만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다음은 환청처럼 매일 떠오르는 말들이었다. 잠을 자다가도 깜짝 놀라 눈을 떴고, 멍하니 TV를 보다가도 머릿속에 내가 들었던 많은 말들이 둥둥 떠올랐다. “어른들은 우는 애들을 싫어하셔, 그렇게 울지 마” “쓸 만한 줄 알았는데, 너 쓸모가 없구나” “너는 너무 예민하고 여려” “너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 그런 말들은 매일 손목과 발목에 하나씩 걸쳐져 있었다. 나는 사실 굉장히 밝고 즐거운 사람인데,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고, 사람들은 잘 이해하는데. 그런 장점들은 다 사라졌다. 그들이 만든 나는 쓸모없고 너무나 연약한 인간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들으면 들을수록 몸에 각인됐다. 그게 서러웠다.

퇴사를 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말을 하려해도 귓가에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도 볼 수 없었고, 책의 글자는 읽을 수 없었다. 아주 아주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우울증에 걸린 동안은 없는 시간과 같아” 어느 날 나를 병원에 데려간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그냥 매일을 죽이고, 다시 죽이면서 버티는 거지. 물속에 빠진 듯이 귀는 먹먹하고 힘이 달려서 목소리를 낼 수 없어. 늪에 갇힌 몸뚱이는 올가미가 돼서 반짝이고 예뻤던 작은 나를 가두지. 생각하는 나는 가끔씩 깨어나서 ‘다시 시작하자, 힘을 내보는 거야’ 라고 말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미 갇혀있으니까. 그게 단순히 우리가 나약해서, 어려서 그렇다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아?

우울은 발버둥칠수록 더 빠져드는 늪에 비유가 되곤 한다. 떨쳐내고 싶어도 온몸에 다시 휘감기곤 한다. 원치 않는데도 일어나는 일이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말해줬다. 우디씨를 늪 가까지는 제가 같이 옮겨줄 수 있어요, 하지만 늪 밖으로 걸어 나가는 건 우디씨의 의지예요.

아마 나는 어찌됐든 늪에 빠진 것은 분명해졌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늪 가로 열심히 기어나와 늪 밖으로 얼굴을 아주 빼꼼 내민 것 같다. 원인이 무엇인지 찾고, 누구를 탓하는 것은 마음의 에너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대한민국의 우울증 인구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그 중 20대의 우울증 증가세는 더 가팔라서 2017년 기준 20대 우울증 환자는 7만6246명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우울증과 아주 밀접해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정신병원에 다니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배척받기 일쑤다. 정도를 넘어선 우울감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그들을 더욱 사각지대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발버둥치고 다시 일어서려는 이들에게 묻는다. 너는 왜 그래?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때마다 누군가는 다시 죽고 싶어진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처 줄 수 있고, 가끔은 서로에게 심각하게 가혹할 수 있다. 그러니 아픈 걸 손가락질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유를 캐묻지 않았으면 한다. 서로를 안아주기에 우린 너무 바쁘고 메말랐으니까. 그냥 그 정도로. 저 사람은 지금 아주 후덥지근하고 떨어지지 않는 긴 장마 속에 있구나, 언젠가 맑은 날이 왔으면 좋겠네. 그렇게, 서로 조금은 다정해졌으면 한다.

우디

본 것을 글로 표현하되,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또 다른 것이 보인다는 걸 언제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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