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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이 자랑인가?[김부복의 고구려POWER 16]
김부복 | 승인 2019.04.01 11:27

[논객칼럼=김부복] 만리장성을 만든 사람은 진나라 장군 몽염(蒙恬)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몽염을 ‘공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몽염은 나라의 북쪽 변방에서 10여 년 동안 장성을 건설했다. 기존 성벽을 연결하고 덧붙여서 잇는 공사였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사막과 산악지대에서 하는 공사였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식량과 자재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군사 30만 명을 동원해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모자라는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죄수들을 투입했다. 그래도 역시 모자랐다.

결국 ‘이민족’인 조선 사람을 대거 동원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 사람은 ‘탄압 대상’이었다. 조선 사람은 속속 공사판으로 끌려갔다.

가혹한 공사였다. 수많은 조선 사람이 지쳐서 쓰러졌다. 그러면 성벽 속에 넣고 그대로 메워버렸다. 오늘날의 ‘인종청소’였다. 만리장성은 그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기도 했다.

Ⓒ픽사베이

진시황이 죽고,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몽염은 소환되었다. 곧바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몽염은 나라에 세운 공이 많은 장군이었다. 북방의 넓은 영토도 개척했다. 억울했다.

몽염은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도대체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돌이킬 수 없는 죄 하나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만리장성을 쌓은 죄’였다.

“그렇다. 죽어도 마땅하다. 나는 ‘임조’에서 ‘요동’까지 10000리에 걸쳐 장성을 축성했다. 그 결과, 천지자연의 뜻을 어기고 지맥(地脈)을 끊고 말았다. 그게 나의 죄다. 나는 그 죗값으로 죽는 것이다.”

이런 ‘과거사’를 갖고 있는 만리장성을 중국이 자랑하고 있다. 국가(國歌)에까지 강조하고 있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여(起來不願做奴隸的人們), 우리의 혈과 육으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세우자(把我們的血肉,築成我們新的長城).”

만리장성에 사용된 건축자재로 높이 2.5m, 폭 1m의 성(城)을 다시 쌓으면 그 길이가 4만km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지구를 한 바퀴 감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성이 되는 것이다.

만리장성의 부피를 환산하면 이집트 대(大)피라미드 120개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다. 달나라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인공적으로 만든 축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게 만리장성이라는 그럴 듯한 거짓말도 있다.

그렇지만, 만리장성은 조금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 건축물이다. 그 목적이 ‘기마민족’에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외세(外勢)’가 무서워서 ‘방어막’을 친 것이다.

따라서 높게 쌓을 필요도 없었다. 대체로 말이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인 2∼3m 남짓이면 충분했다. ‘기마민족’은 말을 타고 있어야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기마민족은 말에서 내려오면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장성의 많은 부분은 오늘날 생각처럼 높지 않았다.

‘엄청’ 높은 곳이 몇 군데 있지만, 이는 단지 ‘과시용’에 지나지 않았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공연히 혹사당했을 뿐이다. 그나마 수없이 무너지기도 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들어왔다가 되레 ‘역공’을 당한 ‘과거사’가 있었다. 이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도 만리장성을 ‘유명무실한 벽’으로 만들었다. 근세에는 유럽 열강이 만리장성을 우습게 여겼고, 일본도 잠깐 넘었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다. 당시 장성을 ‘재건축’한 이유도 ‘원나라의 부활’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명나라 영종(英宗) 때 왕진(王振)이라는 환관이 있었다. 뇌물을 ‘엄청’ 밝힌 환관이었다.

왕진은 벼슬자리를 구하려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 단순한 면담은 은 100냥이었다. 술을 한 잔 할 경우는 1000냥으로 올라갔다. 당시 100냥은 장관급인 ‘상서’의 1년 봉급보다도 많은 돈이었다. 그런데 무려 1000냥이었다.

왕진은 환관이면서도 공명심이 넘쳤다. 1449년 몽골의 영웅 에센(也先)이 침략하자 임금 영종을 부추겨 50만 대군을 끌고 출정했지만 ‘게임’이 되지 않았다. 왕진은 전사하고 임금 영종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영종은 1년 남짓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이를 중국 역사는 ‘토목보(土木堡) 전투’, 또는 ‘토목의 변(變)’이라고 부르고 있다.

영종이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기진맥진해서 돌아왔더니, 그 사이에 자신의 동생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경종(景宗)이었다. 형에게 자리를 되돌려주기 싫은 경종은 신하들에게 황금 50냥과 은 100냥씩을 돌리며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임금이 신하를 매수한 것이다.

그러나 형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영종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임금으로 등극했다. 이 희한한 쿠데타를 ‘탈문(奪門) 사건’이라고 했다.

만리장성은 이때 다시 건설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만리장성은 끔찍했던 포로생활의 악몽 때문에 다시 세운 ‘공포의 상징’이기도 했다.

만리장성은 ‘오그리는 역사의 상징’이기도 했다. 외세를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민을 장성 이남으로 묶어놓기 위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랑이다.

중국은 게다가 만리장성을 엿가락처럼 늘리고 있다. 지난 2009년 만리장성의 길이를 8851.8㎞라고 주장하더니, 2012년에는 2만1196.18㎞로 ‘곱빼기’ 넘게 또 연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만리장성’이 아니라 ‘오만리장성’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늘어놓고 있다. 조금 더 지나면 연해주를 뚫고 만리장성이 태평양에도 닿아 있었다고 우길지 모를 일이다.

김부복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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