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칼럼=곽진학] 봄바람이 여울져 흐른다. 따뜻한 햇살이 그늘진 골목을 찾아 나서고 안산(鞍山)언덕에 핀 샛노란 개나리가 온 산을 곱게 채색해 간다.

어쭙잖은 내 글을 읽은 소꿉친구가 30년 만에 소식을 전해 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양지 바른 곳에 빨래를 말리는 것처럼 자신을 바깥에 다 내놓는 일인가 보다. 정직하게 투영(投映)하지 않고는 글 한자도 옮길 수 없겠다.

“글이 곧 그 사람이다(文如其人)”라는 말이 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삶과 존재를 읽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글에도 생명이 존재한다. 굴절과 왜곡을 배제하고 진실과 정직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바로 글의 생명이다.

생명은 씨앗을 품고 있다. 광풍을 피하고 폭우를 가리는 안전한 곳에 생명을 심어 그것을 보존하고 가꾼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씨앗이 있고 자신을 희생하여 땅속에 묻히고 썩어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는 씨앗도 있다. 육체는 육체를 낳는다.

로마 하층계급 출신으로 귀족 세이아누스의 신임을 얻어 유대 총독의 지위까지 올랐던 본 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는 자신의 천민 출신을 속이고 총독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른 채 외면해  평생 시이아누스의 청소부로 살다 죽게 하였다. 빌라도의 그 매정하고 잔인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찬연한 절망을 낳아 지금도 먼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수치일 수도, 영광일 수도 있다.

인간은 과연 전략적 생존자일까?

부와 명예를 좇아 아득한 신대륙에 흘러들어온 유럽인들은 그들이 만들어 낸 문명과 세계관으로 전쟁을 부르고, 노예제도를 만들고, 원주민들을 그 무서운 오지(奧地)의 깊은 골짜기로 추방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불러일으킨 참담한 야만의 현장 그 자체였다.

인간욕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순례의 여정 앞에 불어오는 바람의 은밀한 언어를 인간의 지식으로는 차마 헤아릴 수 없지만, 영혼 깊숙한 곳에 여미며 흐르는 여명의 신비한 질서에 귀 기울이며 부단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생존의 본질적 방법이 아닐까?

한번이라도 아파 본, 한번이라도 가난해 본 사람은 남의 아픔을, 남의 가난을 무심히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 없다. 살다보면 추녀 밖에서 가랑잎처럼 서성일 때도, 삶을 휘감는 모진 바람을 홀로 맞서는 시간도 있다. 국가와 사회도 다를 바 없다.

고통과 눈물 없이 인간의 행복과 자유, 사회의 진보와 풍요를 논할 수 있을까? 

글 속에 역사와 시대를 밝히고 어두움을 흩어버리는 용기와 소망을 가꾸는 것, 그것이 바로 글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는 식민과 해방, 분단과 전쟁, 그리고 군사독제라는 오열(嗚咽)의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감동과 사랑과 용서보다 아첨과 변절과 침묵으로 육체를 부지한 부끄러운 시대를 살아왔다. 가난과 질병,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창랑(滄浪)의 흐린 물에 발을 담구지 않았던 사람이야 말로 역사와 시대를 도도히 지키고 만든 이 땅의 증인들이다. 역사는 그곳을 지나온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기에 그 진실이 어느 한 사람, 어느 은밀한 한 곳에서 어두움으로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 우리는 창의와 진취,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思考)가 절실히 요구되는 최첨단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산업사회의 프레임과 군사문화의 인습에 젖어 인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그 냉전의 이데올로기(ideologie)를 여전히 생존의 이념으로 여기는가 하면 자본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며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오류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궁극적으로 화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개척하는 길이야 말로 이 시대에 부과된 신성 (神聖)한 명제이자 책무임은 누구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삶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삶을 의미있고 목적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길 수 없는 영혼의 자유이다.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볼품없는 작은 생명을 살뜰히 보듬고 긍휼히 여기는 것, 이것이 인류역사의 진보이고 인간이어서 행복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강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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