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세상구경]

[논객칼럼=허영섭] 어머니를 여읜 지 벌써 네 해가 지나가지만 생전에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그대로다. 돌아가셨을 때의 망연했던 심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는 해도 당신의 흔적으로 남기신 유품을 들여다볼 때마다 회한의 심정이 불현듯 되살아나곤 한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서 돌아가셨지만, 그 전까지 머무르시던 문간방에는 당신께서 생전에 매만지던 손때 묻은 물건들이 아직도 서랍 속에 보관돼 있다.

유품이라고 해야 성경책이나 탁상용 거울을 포함해 평소 옆에 놓고 사용하시던 자잘한 일상용품들 정도다. 머리빗과 돋보기안경, 손톱깎이에 그밖의 잡동사니들이 밀짚 반짇고리에 간직되어 있다. 오랫동안 다닌 교회를 떠나지 못하시겠다며 그 동네에서 혼자서라도 지내겠다고 버티시다가 결국 아흔 연세를 앞두고 아들 집으로 들어오시면서 그동안 사용하던 가재도구를 거의 버리고 오셨으니 유품이랄 것이 별로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 중에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더욱 되살리는 것은 몇 개의 바늘과 실꾸러미다. 옷이 해지거나 양말에 구멍이라도 생기면 직접 꿰매셨으니 그 쓰임새가 작지 않았겠으나 당신의 경우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여백이 남은 종이를 바늘로 꿰어 잡기장으로 쓰고 계셨다. 뜯어낸 달력장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는 실로 묶어 공책으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뒷면이 비어 있는 광고 전단지도 어김없었다. 바늘은 헝겊을 꿰매기보다 빈 종이를 묶는 용도가 더 컸다. 그렇게 묶은 공책에 성경 구절을 써내려가셨다. 짬이 날 때마다 성경책을 넘기면서 촘촘히 베껴 쓰는 게 당신의 취미라면 취미였고,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다.

Ⓒ픽사베이

유별난 것은 새 공책도 마다하셨다는 사실이다. 빈 종이를 묶으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새 공책을 드렸지만 별로 내켜하는 기색이 아니셨다. 그대로 밀쳐놓았다가 잡기장이 모자라면 오히려 새 공책을 뜯어내 다시 실로 묶어 쓰곤 하셨다. 그런 행동이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된 초기치매 진단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유추하기는 어렵지만 나로서는 당연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서랍 속에 자꾸 쌓여가는 잡기장을 보면서 처음의 걱정이 차츰 만류와 언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당신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잡기장은 모두 치웠지만 그 기억은 실꾸러미와 함께 아련한 연민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신이 남긴 수첩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적혀 있어서가 아니다. 손바닥 크기의 수첩은 빈칸이지만 앞쪽 일부 페이지에 표시된 일련번호가 특이하다. 5페이지에 있어 ‘5’라는 숫자가 좌우가 뒤집힌 모습으로 적여 있는 게 그 하나다. 뒷부분의 15페이지에 이르러서도 똑같은 모습이다. 16페이지는 제대로 쓰셨으나 그 다음에는 연속해서 ‘71’, ‘81’, ‘91’로 씌어 있다. 그 뒤로 다시 ‘20’으로 이어지지만 이미 숫자를 착각할 만큼 이상 징후를 보이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식사를 거르지 않으신다는 것만으로 건강에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으니, 분명히 내 불찰이다.

성경책의 페이지마다 씌어 있는 당신의 이름도 내게는 수수께끼다. 자신도 모르게 기억단절 현상에 시달리면서도 이름만큼은 혼자서라도 간직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외로움과 서러움에 파묻혀 지낸 당신이었다. 20대에 갓 들어섰을 무렵 피란 중에 식구들과 헤어져 외톨이가 된 신세였으니 말이다. 어려서 팔베개에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중에 고향인 소청도 시절의 기억을 자주 떠올리곤 하셨다. 백령도에서 멀지 않은 소청도에 살다가 옹진으로 이주했는데, 6·25 동란을 만나 남쪽으로 넘어오다가 얼떨결에 식구들을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게 사무친 여한이 연세가 드셨다고 그냥 사그러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들인 나 자신도 당신이 남긴 유품의 하나다. 특히 말투에 배어 있는 이북 억양이 뚜렷한 증거다. 내 스스로는 명확한 서울 표준말을 사용한다고 여기는 데도 주변 어르신들께서 듣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몇 마디 말씀을 드리다 보면 영락없이 “실향민 출신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 마련이다. 자라나면서 당신의 황해도 말씨를 배운 때문일 것이라 여겨진다.

어머니의 유품으로 말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다. 당신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목도장이다. 언젠가는 당신의 탯줄이 묻힌 소청도를 찾아가 바다가 탁 트인 해변가에 고이 묻어 주리라 생각하고 있다. 생전에 억지로 우겨서라도 고향에 모시고 갔어야 했는데 본인이 싫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돌아가시고 나서 화장한 유골을 인천 연안부두 앞바다에 뿌려드린 것도 헤엄쳐서나마 고향을 찾아가시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쯤은 그 어딘가에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것도 같다. 평소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고 당신의 손때 묻은 성경책을 넘기면서 자상하시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린다.

 허영섭

  뿌리깊은나무 기자 

  전경련 근무

  현 이데일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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