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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의 도망자 [선조·인조·고종·이승만...][이계홍의 세상읽기]
이계홍 | 승인 2019.04.11 10:55

조선 14대 왕 선조 

1592년 음력 4월 그믐날 밤, 선조는 빗줄기가 드센 캄캄한 어둠을 뚫고 궁을 빠져나갔다. 몇몇 문무백관이 날이 밝을 때 떠나자고 간언했지만 왕으로서는 한시가 급했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고 패대기칠 것만 같아서 잠시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은 환한 대낮에 떠날 때, 민낯으로 백성들 보기가 민망했다. 

임금이 돈화문을 나와 안국방을 지나고 경복궁 앞에서 남으로 꺾었다가 네거리에서 다시 서쪽으로 꺾어 돈의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고 홍제원에 이르자 동이 텄다. 임금과 신하들은 물론 후궁·내시·궁녀·근왕병들도 흠뻑 젖고, 가마 행렬은 진흙탕속에 교꾼들이 몸을 가누지 못해 넘어지는지라 여자들의 속곳이 들리고, 치마가 흙탕물에 젖었다. 행렬이 긴 데다 비까지 내리니 몽진 행렬이 더디기만 했다. 

녹번, 삼송, 벽제관에 이르자 아침식사를 할 무렵이었다. 벌써 백성들이 나와 통곡했다. 임금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다는 설움이 복받쳐 머리를 조아리며 우는 자도 있었다. 어느새 도성에도 임금이 궁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이 순식간에 몰려나와 경복궁을 불태우고 전각을 불지르고 기물을 부쉈다. 

선조가 임진강에 이르자 밤이 되었다. 비가 내린 뒤끝이라 날씨는 추웠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신하들과 무장들이 인근 민가로 가서 닥치는대로 나무를 가져와 불을 피웠다. 다음날 어가 행렬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나룻배가 부족했다. 인근 마을의 대문짝과 방문짝을 뜯어 뗏목을 만들었다. 이윽고 강을 건너자 나룻배와 뗏목을 모두 불태웠다. 행여나 왜군이 끌어다 쓰면 어쩌나 싶어서 태워버린 것이다. 적진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건넌 다리를 불태운다는 말은 있어도, 백성의 문짝을 빌려 건넌 뒤 태워버리는 경우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윽고 평양에 당도했다. 임금은 평양 백성들에게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러나 탄금대전투에서 신립 장군이 이끈 5만 군사를 물리친 왜군은 한달음에 한양을 점령하고 바람보다 빨리 북으로 진격했다. 왕은 다시 야반도주했다. 평양성이 함락되고, 선조는 압록강 변경 의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의주에 행궁을 차렸다. 

요동 도독과 명 황제에게 도강할 배를 보내달라고 눈물어린 편지를 보냈다. 명은 자국에서 왜와 전쟁을 치를 것이 두려워 선조에게 배를 보내는 것을 미적거렸다. 일부에선 왜군이 저렇게 빨리 한양과 평양에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조선이 혹 왜와 짜고 명을 치기 위해 진격해오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을 품었다. 선조는 그 사정을 모르고 매일 통군정에 올라 명의 배만을 기다렸다. 그에게는 나라의 안위보다 일신의 보위만이 생존의 근거였다. 

이때 전라도 광주에서 16세의 소년 병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마라톤 전투에서 42.195km의 구간을 달려 승전보를 알리고 죽은 그리스군의 전령보다 25배나 더 뛰어왔다. 그것도 매일 백리 씩 25일을 뛰었다. 그의 품엔 광주 목사 권율이 전라도 이치·웅치전에서 왜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번대를 무찌르고 호남을 지켰으니 도망가지 말라는 장계가 숨겨져 있었다. 호남은 곡창 지대로서 아군의 병참기지가 될 것이니, 조금만 버티면 원기를 회복해 왜를 몰아낼 수 있으니 제발 강을 건너지 말라는 호소문이었다.

상감마마, 저 강을 건너지 마오! 

그러나 그는 어버이 나라, 명나라만을 바라보고 사는 왕이었다. 조선의 장군들이 전공을 세워도 명나라 군대의 구원만 못하다고 내리깎는(差强表表=명군이 으뜸이고 조선군 장수들은 약간 나은 편이라는 뜻) 임금이다. 자식이나 신하들에게 의심병을 일삼고, 중국에는 끊임없이 사대하고, 그래서 왜 일국의 왕을 하는지를 알 수 없는 임금이었다. 

Ⓒ픽사베이

16대 왕 인조

1624년 2월, 팔도부원수 이괄이 인조반정 공훈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근무지인 영변을 떠나 서울로 들어오자 인조는 부랴부랴 피신 길에 나섰다. 임금이 탄 말과 가마가 지나갈 때 한양 백성들이 나와 통곡했다. 한양은 곧 이괄군에 점령당했고, 백성들은 도리어 환호했다. 도망간 군주는 우리의 군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다. 

인조는 공주 공산성에 들어갔다.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 금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앞으로는 또 낭떠러지다. 그 위에 성벽을 치고 앉으니 세상 걱정할 것이 없었다. 공주 백성들이 온갖 음식을 갖다 바치니 먹을 것도 풍부했다. 피난 중에도 과거시험을 쳤는데 모집정원 5명 중 공주 출신이 6등을 했다. 합격 정원을 편법으로 한명 더 늘려 6명을 뽑는 은전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인조가 피난 중에 공주군 우성면 목천리 근처 임씨라는 집에 머물렀다. 임씨 댁이 콩고물에 무친 떡을 만들어 진상했다. 배가 고프던 차에 먹으니 맛이 있었다. 인조는 “임씨가 지어온 떡이 과연 절미(絶味)로다”하고 평소 양을 초과해 다섯 개나 먹었다. 인조가 공주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고, 그후 임씨가 만든 떡이 절미라는 인조 임금의 평가에 따라 ‘임절미’로 불리다가 말하기 좋은 발음으로 전화(轉化)되어 오늘날 국민 떡 ‘인절미’가 되었다. 

1627년 1월 건주여진족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 군대가 이미 투항한 강홍립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용천·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건넜다. 후금 군대는 “후금과 친한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계속 남하하여 안주·평산·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했다. 조선군은 장만을 도원수로 하여 맞섰으나 역부족으로 후퇴를 거듭, 개성으로 물러났고,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고, 소현세자는 조선왕조의 뿌리인 전주로 도망을 갔다. 두 번째 피난이었다. 정묘호란이다. 

광해군을 쫓아낸 세력들은 광해군의 후금과의 실리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펼쳤다. 광해를 친 명분이 어버이나라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고, 후금은 화가 났다. 실제로 분노를 조선을 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1627년 2월9일 후금은 한양을 친 다음 조선에게 명나라의 연호(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 강제로 ‘형제국의 맹약’인 정묘조약을 맺었다. 조선은 종실인 원창군을 왕자라고 속여 인질로 보냈다. 인조는 아들들이 붙잡혀가지 않은 것을 천행으로 여기고, 왕자 대신 종실 자식을 보내자는 아이디어를 낸 신료들을 승진시켰다. 

인조는 명나라 연호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의리를 중시하는 왕답게 여전히 명과 군신(君臣) 관계를 유지했다. 광해군이 청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이유로 쳤으니 반금친명 정책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후금은 요동반도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북경을 공격하면서 천하통일을 이루는 과정에 있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후방을 공고히 해야 했고, 군사물자도 구비해야 했다. 그래서 조선에 형제국에서 명나라와 같이 군신관계로 할 것과 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정병 3만을 보내라고 터무니없이 요구했다. 안들어주면 쳐들어간다는 계산법이다. 인조는 후금의 사자로 온 장수 용골대와 마부태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몰래 명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은 그 몇 달 후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에게 패해 멸망하고, 홍타이지는 중원 석권을 선언하고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청이라고 칭했다. 홍타이지는 부임 첫 사업으로 인조에게 왕자와 대신,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조선은 주화론자보다 척화론자가 여전히 드세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나라 군대는 6일만에 단숨에 한양 인근까지 와서 인조가 피신할 루트인 강화도 길을 먼저 봉쇄했다. 인조는 갈팡질팡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12월 15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 남한산성에 갇혀 지냈다. 남한산성으로 숨어든 것은 흡사 사냥꾼에게 쫓겨 눈밭의 구멍에 머리만 박은 토끼 꼴이었다. 대단히 어리석은 전략이었다. 

남한산성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매서운 눈보라와 맹추위와 싸워야 하는 악조건이었다. 1월 30일 인조는 결국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수백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포가 아닌 평복을 입고 청태종 홍타이지를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알현할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이때 인조의 이마에서는 땅바닥에 이마를 마구 찧어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예식이 끝난 후 홍타이지는 인조를 풀어주고, 인조는 도강하기 위해 한강으로 나왔다. 그런데 사공은 사라지고, 빈 배 두척만이 남아 있었는데, 서로 건너려고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켜 영하 20도의 찬 물에 빠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한 가운데 강을 건너자 수만 명의 백성들이 나와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며 울부짖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북으로 인질로 끌려갔고,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궁녀, 사대부 부인, 양반 자제 등 수십 만명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들이 돌아오자 호로자(胡盧子), 즉 호로자식이 되었고 환양녀(還鄕女), 즉 화냥년이라는 치욕적인 말이 생겼다. 

“(명청 교체기에)고려처럼 안으로 힘을 쌓고,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면서 막상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는 광해군의 어록이 생각나는 순간이다(광해군일기). 

26대 왕 고종

명성왕후가 암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거처한 일이 생겼다. 바로 아관파천이다. 주권국가가 자국 내에 있는 외국 공사관에 숨어서 사는, 세계사적으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시아버지(대원군)와 며느리(명성왕후)가 싸우는 과정에서 조정은 늘 태풍 맞은 어장처럼 어수선했다. 경복궁 중수다, 뭐다 해서 국고는 바닥이 나고, 외세는 호시탐탐 노리고, 군인의 군량에 반은 모래로 채우고, 나머지 반을 착복하는 따위의 비리가 일상이 되고, 백성은 굶주리고, 그래서 민란이 잦고 민심은 흉흉해지고... 나라라고 할 것이 없었다. 

이런 때 경사스런 일이 일어났으니, 명성왕후께서 아들을 보신 것이다. 왕후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남편 고종이 다른 후궁에게서 아들(완자군)을 낳아 시아버지 대원군과 함께 그 아이를 세자책봉하려 했는데, 그때 얼마나 가슴 졸였던가. 이런 때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들이 항문이 없는 장애자로 태어났다. 

명성왕후는 무당과 승려를 불러들여 점을 치고, 굿을 하며 해결책을 강구했다. 무당은 금강산 1만2천봉에 쌀 한가마니씩 갖다 바치면 왕자의 똥구멍이 뚫릴 것이라고 점괘를 내놓았다. 아들을 살리려는 지어미의 지극한 정성은 곧바로 행동에 옮겨졌다. 아낌없이 금강산 1만2천봉에 쌀 한가마니씩 올려놓았다. 행여나 부정이라도 탈까 싶어서 한 홉이라도 더 얹어서 쌀가마니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산짐승들의 좋은 먹거리가 되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천벌이 내린 것인지, 무모한 미신에 기댄 화근 때문인지 아이는 아무런 효험없이 죽고 말았다. 서양에서는 벌써 외과수술로 맹장수술을 하고, 여러 가지 임상 실험으로 인간의 병을 고치는데 조선은 최고 지도자란 분이 점괘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온전할 리 있었겠는가. 

그러나 명성왕후는 무당을 엄청 사랑했던지 그들에게 이것저것 후한 벼슬을 내렸다. 뿐만아니라 임오군란이 일어나 충주로 피신할 때는 가마를 끈 '앞 교꾼'을 전라병사(全羅兵使)에 임명하고, '뒷 교꾼'은 낙안군수로 임명하는 인간미도 보여주었다. 자신의 감기를 낫게 해준 사람을 양평군수에 임명했다. 냉대하증을 고쳐준 최석두를 고산군수에 이어 남원부사로 임명했으나 대하증이 심해지자 한양으로 불러들여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간미가 있는 반면에 이처럼 잔인한 면모도 보여주고 있었다. 고종과 섹스한 후궁을 질투심으로 죽이기도 했다. 후궁에게서 태어난 완자군도 13세 때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국고가 비자 매관매직으로 자금을 모았다. 과거시험 합격증을 매매했다. 사대부들도 얼씨구나 하고 내놓고 권세를 이용해 먹을 것을 챙겼다. 지도자의 나쁜 것을 동물적으로 따르는 것은 탐관오리의 정해진 탐욕 수법이다. 

경복궁 중수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천주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신자 학살, 통상수교 거부정책,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가 궁을 지배했으니 나라가 흔들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허수아비 같은 왕(황제)이 있었으니 나라가 안 망한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네이버 자료 인용).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면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종성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챙겼다. 아관파천 1년간은 나라가 러시아의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이 초빙되고,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조선반도 병탐을 노골화했다. 보다 못한 선비들이 전국 각처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에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왜군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보다 훨씬 쉽게 조선반도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고종의 딸이 청나라 대신 이번에는 일본으로 인질로 끌려가고, 아들 역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여자와 정략 결혼한 뒤 일본 육군 중장이 되었다. 나이 어려서 끌려가 일본문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역사관에 젖었으니 조선왕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리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조국에 아무런 기여한 바가 없이 적국에서 죽었다. 

변화하는 세계사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구 퇴영적 태도가, 결국은 사건이라고 생긴 것은 모조리 겪으면서 나라는 망해버렸다. 

이승만은?

북한군은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를 기해 전면 기습 남침했다(김삼웅 전 서울신문 주필의 글을 일부 발췌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 조반을 마치자 오전 9시30분경 경회루에서 붕어와 잉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북괴군의 남침 보고는 10시30분경 받았다. 전쟁 발발 6시간 만이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군의 전면 남침 보고를 6시간 뒤에 받고, 국무회의를 소집한 시간은 발발 10시간이 지난 오후 2시였다.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ㆍ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채병덕은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국군 제17연대가 해주로 진격 중이며, 곧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 시각 제17연대는 반대로 인천으로 패주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6월27일 새벽 4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탈출해 대전으로 갔다. 직전에 국회에서는 수도 사수를 결의했는데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위원들에게도, 육군본부에도 '서울 탈출‘을 통고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 지 몇시간 후부터 한강 인도교에 폭탄의 기폭 장치가 설치됐다. 그리고 6월28일 새벽 2시30분 육군 공병부대에 의해 한강철교가 폭파됐다. 다리를 지키고 있던 경찰과 난을 피해 다리를 건너던 시민 600-1,200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혔다. 이후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던 서울시민 수만 명이 적 치하에서 죽고, 살아남은 자 중 수만 명도 수복후 적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대전을 거쳐 대구로 갔던 이승만은 너무 내려갔다는 판단에서인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27일 밤 9시경 녹음 방송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는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허위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됐다. 

대전에서 4일을 머문 이승만은 7월1일 새벽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했고, 7월2일에는 목포에 도착하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도 검토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 초기의 황금 시간대를 도망치느라 다 놓쳐버렸다. 국군최고통수권자의 지위를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친공적인 태도인지, 결과론적으로 그 자체만으로 보면 오해 를 살만했다. 

분단 이후 1949년과 1950년의 38선은 남북 양측 군대 사이에 송악산 전투 등 크고 작은 충돌이 잦았다. 사실상 전시 상황이었다. 김일성 집단이 언제든지 쳐내려올 수 있다는 첩보도 계속 들어왔다. 그런데 안이하게 대처하거나 묵살했다. 이승만이 친공주의자가 아닐까 할 정도로 대처에 무능했고, 6.25가 나서도 유엔군이 오기 전까지 연전연패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 천행(天幸)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운도, 기적도 아니다. 국민의 힘이다. 지도자는 도망 다녔지만 국민이 나라를 지키고 곧추 세워나갔다.

그 힘이 평화가 일상이 되는 세상으로 끌어가기를 바란다. 구체제의 벽을 허물고 동아시아 평화 번영의 길을 열어나가길 바란다. 그것이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종착점이다.

 

이계홍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여론독자부 차장

서울신문 수석편집부국장 통일문제연구소장

용인대 겸임교수,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객원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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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  khlee054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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