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논객칼럼=이호준] “주지스님, 안녕하세요? 직접 찾아뵙고 정중히 말씀드리는 것이 지당하나 용기가 나지 않고 두려워 이런 비겁한 방법을 택하게 됐습니다.”

한밤중에 도착한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편지지나 백지가 아닌 포장지 같은 거친 종이를 찢어서 쓴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글씨 하나하나에는 진정성이 지문처럼 배어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주지스님’이라는 단어가 낯설 것 같아서 배경설명부터 해야겠군요. 떠돌며 사는 것을 업으로 지고 나온 저는 강원도 인제의 예술인촌을 떠나 경기도의 한 사찰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이제 한 달 열흘쯤 되었군요. 이곳에서 제 직업은 ‘관리처사’입니다. 옛날에는 ‘불목하니’라고 부르던, 절에서 이것저것 잡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의 ‘편지 사건’은 며칠 전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느닷없이 개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낯선 개가 분명한데 한 자리에서 쉬지 않고 짖어댔습니다. 플래시를 들고 나가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역시 관리처사의 업무이니까요. 소리를 따라가 보니 약사전 앞 향나무에 하얀 개 한 마리가 매어져 있었습니다. 저녁에 한 바퀴 돌 때까지 없던 개였습니다. 누군가 한밤중에 데려다 놓은 것이지요. 느닷없이 절 마당에 고립된 개는 겁에 질려 계속 짖는 것일 테고요.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걸 어쩌지? 고민스러웠지만 회주스님이나 주지스님과 연관이 있는 개가 아닐까 싶어 그냥 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침에 주지스님을 만나자마자 개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지스님은 아무 말 없이 편지를 한 통 내밀었습니다. 개가 매어져 있던 곳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글씨가 빽빽하게 쓰인 편지는 무려 네 장이나 되었습니다. 몇 줄 읽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10년 전에 북한에서 혼자 내려와 3년 전부터 절 인근에서 사는 누구라고 적은 서두부터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픽사베이

“얼마 전에 북에 계신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앓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할 수도, 직접 얼굴을 볼 수도, 찾아갈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희망을 잃지 않고 마음 속 괴로움을 추스르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돈을 벌어 인편으로 어머니 간병비를 보내야 하는데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은 모두 다른 지방에 있는 터라, 이곳을 떠나야 할 상황입니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오랜 기간 함께 지내온 개가 걱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길에 버려진 어린 강아지를 데려다 키우면서 깊은 정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일하는 곳으로 데려갈 수도 없고, 맡길 사람도 없고, 안락사를 시킬지도 모르는 보호센터에 보낼 수도 없다는 사정이 절절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결론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맡아서 돌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바닥이라도 좋으니 자그마한 공간 하나 잠시만 내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당장은 어렵지만 어머니 치료비만 마련되면 반드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OO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풀어주십시오.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편지 내용은 “죄송하다” “면목이 없다” “부탁한다”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의 전부라는 8만 원을 동봉했습니다. 읽는 내내 강물이라도 흐르는 듯 가슴이 쿨렁거렸습니다. 저 역시 인제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키우던 개를 맡길 곳이 없어서 크게 고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앞날이 어찌 될지 확신도 없이 함부로 키우기 시작한 제 자신이 문제였지요. 결국 제가 이 절까지 오게 된 과정도 그 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개가 먼저 오고 제가 따라온 셈이 됐습니다. 그 또한 인연의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지스님이 편지를 보여준 것은 제 동의를 얻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결국 돌봐줘야 할 사람은 관리를 맡은 저니까요. 두 말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족이니 뭐니 하며 키우던 개를 외진 곳으로 데려다 버리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에, 그런 절절한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기견 문제는 거론하는데 새삼스러울 정도로 심각합니다. 이 땅은 어언간 유기견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있는 절 근처에도 버리고 간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여러 마리 살고 있습니다. 신도들이 돌보고 저도 밥을 챙겨주기 때문에 비교적 문제없이 살아가는 편이지만 어디 주인과 함께 사는 것만 하려고요. 그 중에는 어릴 때 버려진 개들도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가족’에게 버림 받고 도심을 떠도는 개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요. 유기견은 ‘버리겠다’는 사람의 의지가 분명히 들어있는 개들입니다. 산책 중에 잃어버리거나 집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경우 등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싫증이 나거나 병이 들면서 일부러 버리는 개들입니다. 그렇게 버림받은 개들은 이곳저곳 떠돌면서 야생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방송을 보면 무인도에 버려지거나 심지어 쓰레기통에 유기된 강아지들까지 등장합니다. 버려진 개들의 운명은 대개 비극으로 끝납니다. 떠돌다 병들어 죽거나 보호센터에 맡겨진다고 해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기견의 대모'로 불리던 여성이 구조 동물 200여 마리를 안락사 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큰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부산지역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2018년 유기견 4377마리 가운데 새 주인에게 입양된 경우는 16.3%인 716마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전체의 35.8%인 1568마리는 보호소에서 자연사했습니다.(연합뉴스 2019년 1월 29일자) 결국 주인에게 버려진 개는 대다수가 다시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 때 가족이니 반려견이니 부르며 한 공간에 살던 생명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간절한 편지와 돈까지 동봉한 한 탈북인의 개를 사랑하는 마음은 차라리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제게 전달 됐습니다. 주지스님과 저는 그날부터 그 개에게 밥과 물을 챙겨주고 아침마다 산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맡을지 말지 따로 의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돌봐주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모든 생명이 존중 받는 세상이기를 소망합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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