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세상구경]

[논객칼럼=허영섭]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70년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화려한 공직 기록을 남긴 인물을 꼽자면 단연 이회창 전 국무총리일 것이다. 대법관과 중앙선관위원장을 지냈으며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집권당이던 신한국당 대표 자리까지 올랐던 주인공이다. 사법·행정·입법부를 거치며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자리인 대통령 도전에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세 차례나 연달아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니, 정치적 회한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그 회한을 기록한 ‘이회창 회고록’을 읽고 있다. 그의 국무총리 재임 당시부터 지금껏 가까이 보필하고 있는 이흥주 비서실장으로부터 오랜 만에 연락을 받은 데 이어 회고록이 택배로 배달된 게 보름 전쯤이다. “뒤늦게나마 갑자기 생각이 나셨는지 ‘허 기자에게도 책을 보내주라’고 분부를 내리셨다”는 게 이 실장의 전언이다. 내가 ‘법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 제목의 이회창 평전을 낸 것이 20년도 더 지난 1995년의 일이었고, 그 뒤에도 간간이 문안을 드리던 사숙의 인연이 문득 떠올랐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이회창 회고록 Ⓒ교보문고

출판된 지 이미 두 해 가까이 지난 이 회고록을 새삼 거론하는 것은 “정치는 왜 하는가”라는 이회창 나름대로의 화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모두 10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두 권으로 묶인 두툼한 회고록 내용 중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루는 질문일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외환위기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1999년의 상황이다.

“경제난 때문에 기업이 도산하고 실직과 가정 파탄의 파도가 휩쓸던 우울한 시절이었다. 어느 중소기업에 다니던 가장이 해직당한 후 아내와 이혼하고 일곱 살, 다섯 살의 어린 두 아들을 보육원에 맡겼다. 그는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일자리를 구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고 달래고는 떠났다. 얼마 동안 아빠는 일요일마다 아이들을 보러 왔으나 그 후로는 오지 않았다. 형제는 일요일이면 복도에 걸터앉아 아빠를 기다리며 보육원 정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는 기사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실토하면서 “지금도 그 어린 형제를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해진다”며 민생에 대한 정치인들의 책임을 강조한다.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아버지나 아이들처럼 공동체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의 삶과 존엄을 찾아 줌으로써 튼튼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더욱이 외환위기 당시 자신은 여당 대표였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가 20년 전의 시대 상황을 인용했지만 정권이 몇 차례나 바뀐 지금에 이르러서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생활고에 쫓긴 나머지 30대의 젊은 부부가 철부지 두 아이를 꼭 껴안은 채 마지막 방법을 택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얘기다. 비슷한 사연을 지닌 ‘송파 세 모녀’의 비극이 아직도 기억에서 채 가시지 않은 마당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회적 책임을 느끼지 않을 리 없건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더 집착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회창 본인이 집권에 성공했다고 쳐도 우리 정치·사회상이 크게 달라졌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경제를 다루는 것은 더욱 어렵기 마련이다. ‘정치 9단’이라는 김영삼·김대중이 대통령을 지내면서 아들을 감옥에 보내야 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서도 우리 정치의 복잡한 실상을 짐작하게 된다. 그 뒤를 이은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현재 자택과 구치소에 갇혀 있는 신세다.

이회창에게도 정치에 걸음을 내디딘 이후 우여곡절이 이어졌고, 그는 의연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한 이듬해 여의도 당사로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미국 대학에서 1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인사 겸 취재차 방문한 자리였다. 그의 위치도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면담에서 던진 질문이 지금 생각에도 당돌했다. “대선 후보를 지내셨고 경선을 통해 야당 대표에 오르셨는데, 외람됩니다만 정치가 재미있으십니까?” 하지만 그는 “내친걸음인데, 뭘”이라며 오히려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가 두 번째 대선에 도전했던 2002년에도 독대 기회가 있었다. 그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평전을 낸 출판사에서 속편을 내자는 제의를 받고서였다. 하지만 그는 심층 인터뷰 제안에 “그때는 내가 때가 덜 묻었으나 지금은 정치 때가 묻었기 때문에 재미가 없을 것”이라며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세 번째 도전에서는 그를 직접 모시는 입장에서 선거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법조를 출입하면서 취재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났던 인연이 이렇듯 확대된 것이었다. 아직 서소문 대법원 시절 대법관이던 그의 집무실을 취재라는 명분으로 몇 차롄가 방문했을 당시 그는 이미 ‘대쪽 판사’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었다. 그를 취재 현장에서 다시 만난 것은 국무총리실을 출입하면서였다. 하지만 결국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 설치 문제로 김영삼 대통령과 마찰이 생기면서 미련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앞서의 평전을 쓰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그렇다고 정치인으로서 이회창의 행적이 모두 옳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각 진영 사이에 수많은 다툼이 벌어졌고,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서로 평가가 엇갈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법과 원칙을 처신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는 것만큼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회고록 앞부분의 몇 페이지밖에 넘기지 못한 단계에서 너무 앞서나간 얘기인지 모르겠다. 그가 사례로 든 20년 전의 그 어린 형제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새삼 궁금해진다.

 허영섭

  뿌리깊은나무 기자 

  전경련 근무

  현 이데일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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