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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궁핍
곽진학 전 서울신문 전무 | 승인 2019.05.16 11:04

[논객닷컴=곽진학]

나는 재학생수가 1백오십여 명 남짓한, 막 설립한 시골 사립중학교를 다녔다. 가난한 농촌이라 월사금을 제 때에 또박또박 납부하는 학생은 불과 이삼십 여명 밖에 되지 않아 학교재정이 어려운 때문인지 선생님은 얼굴 익힐 만하면 늘 바뀌곤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늦게 입학한 동급생 중에는 나이가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친구도 더러 있어 젊은 선생님들은 그 학생들을 대할 때 무척 어색해하고 조심스러워 했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전체 졸업생 28명)에서 중학교로 진학한 친구가 10명 미만이었으니 당시 농촌의 피폐한 삶은 가히 짐작 하고도 남는다.

중학생이 되면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는 뒷전이었고 겨울 방학에는 나무하러 산에 다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 험하고 깊은 산도 황폐하고 벌거벗은 민둥산 그 자체였다. 썩은 나무뿌리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가 하면 싱싱한 소나무를 도벌하여 “장작“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 가기도 했다. 산에서 ”갈비“(솔잎만을 긁어모은 나뭇단) 한 짐을 지고 오는 날은 횡재를 하는 것으로 여겨 표토(表土)는 아예 쌓일 틈이 없었고, 칡뿌리를 캐게 되면 마치 산삼을 찾은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연한 소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낸 송피(松皮;소나무 속껍질)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했던 야생적 시대였다.

보리등겨를 채질하여 내린 까칠한 보리 가루를 솥에 넣고 찐 ”보리떡“으로 아침저녁을 때우는가 하면 삼사월 그 공포의 ”보리고개”에는 식량이 떨어져 몇 끼씩 굶기도 하여 영양실조로 핏기를 잃은 어른들의 모습은 참혹했다. 삶 한가운데 죽음이 출렁이고 내일은 어둠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학교 뒷산에서 줍는 솔방울이 한 겨울 교실난로의 유일한 땔감이었고 그 선망의 도회지에서는 마루 밑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장작의 부피가 그 집 살림살이의 형편을 가늠하는 저울이었다.

이른바 20세기 중엽, 문명과 등진 농촌 삶의 참담하고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픽사베이

어머니의 머리에 인 보따리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가난의 사연은 구구절절이 더 서럽고 구슬펐다. 얼어붙은 논둑을 맨발로 걸어가면서도 먹구름사이로 여리게 쏟아질 햇살을 기억하고 자신 안에 움트고 있는 절망을 지평선너머로 흩어버리며 켜켜이 지켜온 목숨들! 그들의 육체는 여기저기 기근의 흔적이 또렸했으나 그 영혼은 궁핍을 꿰맨 자국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터무니없는 기근과 궁핍은 21세기 기술문명의 눈부신 발전에도 여전히 우리의 숙명적인 과제로 남아 내일을 더 어둡게 하고 있다. 빈곤은 이제 단순히 의(衣),식(食),주(住)의 결핍이라는 개념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과 행복 등 인간답게 살 권리로 그 의미가 보다 근원적인 삶의 명제로 다가섰다.

골목마다 서성이고 있는 이 빈곤을 단순히 당사자의 무식과 나태와 무능의 탓으로 귀책하기에 앞서 태어날 때부터 소득, 교육, 권력, 기회 등이 박탈되어 소외와 무력과 절망으로 자신을 허물지 않을 수 없었던 환경적 요인도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정부가 표방한 소득주도 성장과 일자리경제, 공정 경제, 혁신성장 등의 정책도 소득의 증가와 분배를 통하여 양극화와 불평등, 빈곤의 대물림을 단절하고 풍요의 사다리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의지에서 도출한 개념일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빈곤을 “착취”의 극단적 개념으로 이해했지만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이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신분, 명예, 존경을 인간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민주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겪는 상실감과 박탈감은 분노를 넘어 가족해체, 폭력, 아동 학대, 범죄, 자살로 이어져 공동체훼손의 위험으로 잠재하고 있다.

볕이 들지 않는 집에서는 사람이 기거할 수 없다. 생명력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미광(微光)의 그림자도 없는 지하 캄캄한 그 곳에서 잠자고 먹고 살 수밖에 없다. 볕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나누어주지만 인간만이 그 볕을 차별하고 가린다.

세계경제 11위 안팎의 나라, 이제 숨가뿐 성장에만 집착하는 미련과 유혹을 뿌리치고 이웃의 절절한 탄식도 가슴에 담아 공동체로서의 최소한의 공간이라도 마련할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 겨우 제도화되고 있는 사회안전망 구축과 일자리창출 등 복지와 고용정책을 보다 촘촘히 보완하여 공정한 룰과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정의롭고 평화로운, 그래서 인간이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지구촌의 67억 인구가운데 그 절반이 넘는 46억의 사람들이 하루 2달러로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욕망을 그 반으로 줄이면 빈곤의 양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필요를 위해서는 늘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하여는 언제나 결핍하지 않았던가?

“조각이란 쓸데없는 것을 덜어내는 작업이다.”

 

곽진학 전 서울신문 전무  joongsoo9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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