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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동학농민운동의 불길과 남겨진 역사의 흔적[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삼정의 문란과 농민항쟁: 전북 정읍 동학농민운동 유적지를 중심으로
김희태 | 승인 2019.05.20 12:03

[논객칼럼=김희태] 조선 후기의 역사를 다룰 때 삼정의 문란은 해당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최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녹두꽃>에서도 관련 내용은 중요한 주제로 언급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과 관련한 이슈는 폭발성이 있는 주제로,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여기서 삼정은 크게 ▶ 전정(田政, 토지에 매기는 세금) ▶ 군정(軍政, 병역 대신 내는 군포) ▶ 환정(還政,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와 함께 받는 제도) 등으로 구분된다. 문제는 이러한 세금에 대한 원칙이 무너지면서 다양한 편법이 등장하게 된다. 때문에 삼정의 문란은 농민항쟁이 발생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동학농민운동의 배경이 싹트고 있었다는 점을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삼정의 문란과 함께 들불처럼 번진 농민항쟁 Ⓒ김희태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요인과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탐관오리의 명사처럼 인식된 조병갑의 탐욕은 끝이 없었는데, 다음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고을(=고부)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일곱 조목인데, 이결(移結), 전운소(轉運所)에서 총량을 늘린 양여미(量餘米)로 인해 새로 생긴 부족분, 유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거두지 못한 결세미(結稅米), 개간한 진답(陳畓)에 대한 도조(賭租), 개간하지 않은 진답에 대한 시초(柴草),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水稅), 팔왕보(八旺洑)의 수세입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31년 4월 24일 기사 중

위의 기사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조병갑의 탐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 중 만석보(萬石洑)가 있다. 단순히 이름만 보면 좋은 의미인 것 같지만 이 저수지는 백성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이유는 만석보를 만들기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고 수세(水稅), 즉 물을 이용하는 값을 비싸게 받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농업이 중심인 사회로 괜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직파법(直播法)에서 이앙법(移秧法)으로 농법의 변화와 함께 가뭄을 대비하기 위한 저수시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필요하지도 않은 만석보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결과 만석보는 조병갑의 탐욕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만석보유지비,Ⓒ김희태
만석보 혁파 선정비, 만석보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김희태

실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백성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된 만석보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상징성이 있는 장소인 만큼 만석보를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 동학농민운동의 봉기 이유가 더욱 부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만석보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석보 혁파 선정비’가 세워져 있어 당시 백성들이 만석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과 관련한 부분은 민감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속에 농민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갔던 시기,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만석보는 여전히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 사발통문 작성과 말목장터의 감나무 아래에서 시작된 고부봉기

이 같은 조병갑의 횡포는 끝이 없었는데, 효도나 도박 등의 죄목으로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태인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돈을 걷었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조병갑을 찾아가 진정을 넣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 감세를 청원했던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게 되면서, 들끓는 고부의 민심과 더불어 전봉준은 고부봉기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전봉준의 신분은 동학의 접주(接主)였다. 접주란 일종의 포교소 책임자였는데, 당시 동학의 교세 확장으로 조정에서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이어가고 있었다. 즉 동학농민운동은 동학교도 + 농민봉기의 성격이 결합된 양상을 보인다. 

사발통문 작성의 집 Ⓒ김희태
사발통문, 이전의 농민항쟁과 그 성격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김희태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은 기존의 농민항쟁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는 농민봉기를 계획했던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562-1 번지에 위치한 ‘사발통문 작성의 집’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발통문(沙鉢通文)은 고부봉기를 알리는 일종의 궐기문 성격이다. 특징이라면 둥근 사발을 엎어 원을 그린 뒤 원의 둘레로 이름을 적었는데, 이는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발통문은 크게 ▲고부군수 조병갑을 죽이고, 그 목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의 점령 ▲조병갑에 협력한 탐관오리들에 대한 징계 ▲전주성을 점령한 뒤 한양까지 진격하는 것을 담고 있다. 이처럼 동학농민운동은 우발적이 아닌, 조직적으로 준비되었음을 사발통문이 보여주는 것이다. 

동학혁명모의탑, 시대에 따라 동학농민운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김희태

기존의 농민항쟁의 경우 대개 탐욕을 일삼은 관리에 대한 무력을 동반한 시위를 하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후 조정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안핵사(按覈使)를 파견해 백성들을 다독이고, 관련자를 처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관리를 파견한 사람이 왕이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지켜야할 선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농민항쟁을 보면 대부분 자기 지역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지역을 벗어나는 행동은 자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의 경우 전주성의 함락시킨 뒤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점이나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한 것은 조선왕실의 입장에서 보자면 명백히 반역에 해당하는 행동이었다. 때문에 <녹두꽃>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전봉준(=최무성 역)과 황석주(=최원영 역)가 갈등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이 앞선 농민항쟁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목장터, 지금의 이평면사무소 인근이다. Ⓒ김희태
새로 식재한 감나무, 이곳에서 전봉준은 농민봉기를 독려했다. Ⓒ김희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봉준은 현 이평면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감나무 아래에서 농민봉기를 독려했는데, 바로 말목장터가 위치했던 곳이다. 훗날 3.1만세운동이 장날을 맞아 확산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으로,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당시의 감나무는 고사했고, 지금 남아있는 감나무는 새로 식재한 나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장소다.

한편 말목정과 도로명 주소 등을 통해 옛 말목장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말목장터와 감나무는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다. 

■ 고부관아의 점령과 황토현 전투, 무혈 입성한 전주성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위치한 고부관아 터는 고부봉기의 상징적인 장소라 할 수 있다. 고부관아가 위치한 곳은 지금의 고부초등학교로, 표석을 세워 이곳이 고부관아 터였음을 알리고 있다. 아쉽지만 옛 관아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학교 옆 고부향교를 통해 이곳이 관아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산의 정상에는 고사성(=고사부리성)이 자리하고 있는데, 백제 때 5방 중 중방에 해당했던 곳이다. 재미있는 점은 고사부리성의 성벽에 대동(大同)명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고부관아가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해당 각석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부관아 터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김희태
고부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고부관아 터 표석 Ⓒ김희태
고사부리성에 새겨진 대동(大同)명 각자 Ⓒ김희태

이후 신임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에 의해 상황이 수습되며 농민봉기는 해산되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의 책임을 동학농민군에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면서 결국 동학농민군이 재집결하게 된다. 여기에 이전까지 고부라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이루어진 농민봉기가 이때를 기점으로 태인(泰仁)과 무장(茂長)에서도 참여하는 등 지역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이 재집결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관군을 파견하게 되고,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대치 끝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니 바로 황토현 전투였다.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첫 승리를 거둔 지역이다. Ⓒ김희태
전주 풍남문, 한 고조 유방이 풍현 출신이었기에, 풍은 제왕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김희태

당시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을 필두로 전라감영군과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2300여 명의 군사를 백산으로 집결시키고 ▶ 전라병사(全羅兵使)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동학농민군은 1894년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에 맞서 첫 승리를 하게 된다. 이어 장성에서 홍계훈의 부대마저 격파한 결과 4월 27일 전주성으로 무혈입성하게 된다.

전주(全州)가 어떤 곳이던가? 조선왕실의 발상지라고 이야기하던 곳이었기에, 조선 조정이 받은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잘못된 선택, 외세의 개입과 실패로 끝난 동학농민운동

그러자 조정에서는 훗날 천추의 한을 남기는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되는데, 바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인 청나라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톈진조약(1884)에 따라 청나라가 개입할 경우 일본 역시 개입할 명분이 생긴다는 점. 사태는 점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정 역시 당황해 동학농민군과 화약에 나서게 되고, 이로써 전주화약(1894)이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청일전쟁(1894~1895)이 발발하면서 사태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조짐을 보이자,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2차 동학농민군이 집결하게 된다. 하지만 우금치 전투(1894)의 패배로 동학농민군은 와해되며,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서울 종로1가 사거리에 세워진 전봉준의 동상, 우금치 전투의 패배와 함께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다 Ⓒ김희태
정읍시 이평면 조소마을에 위치한 전봉준 고택 Ⓒ김희태
전봉준 단소, 시신이 없는 가묘로 전봉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동학농민운동을 접근해보는 것도 좋은 탐방이 될 것이다. Ⓒ김희태

한편 동학농민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하면 단연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들 수 있다. 앞선 말목장터의 감나무 아래에서 봉기를 독려했던 전봉준의 옛집이 바로 정읍 이평면 장내리의 조소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언뜻 보면 단출한 초가집이지만, 상량문을 통해 1878년에 지어진 집인 것을 알 수 있고 나름의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에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전봉준의 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봉준의 단소가 자리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가묘를 조성한 것인데,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던 전봉준의 단소를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도 정읍 곳곳에 남겨진 동학농민운동 유적지를 통해 동학농민운동과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점은 주목해서 바라볼 지점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녹두꽃>을 통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동학농민운동 유적지에 대한 관심과 함께 우리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을 간직한 현장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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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bogir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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