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논객칼럼=이동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種瓜得瓜 種豆得豆)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특정한 재주를 남다르게 지닌 가문이나 혈통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가수 김안라(金安羅, 1914∼1974)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종군간호부 복장을 한 가수 김안라 Ⓒ이동순

김안라는 1914년 함경남도 원산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매 중의 둘째로 출생했는데, 맏오빠는 초창기 가요계의 중진이었던 김용환(金龍煥, 1909∼1949), 바로 밑의 아우는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金貞九, 1916∼1998), 막내가 피아니스트 김정현(金貞賢, 1920∼1987)이었지요. 여기에다 김안라의 올케언니, 즉 김용환의 아내는 가수 정재덕(鄭載德)이었으니 그야말로 온 식구가 음악가족이라 할만 했습니다.

(오른쪽부터)김용환, 김안라, 김정구 남매 Ⓒ이동순

김안라는 원산에서 광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성여학교를 다녔습니다. 1930년 1월 28일 아침, 김안라의 나이 16세 때 원산의 공사립학교 재학생들이 일제히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경찰에 검거된 사건이 중외일보 기사로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원산 진성여학교 생도의 주동자가 바로 김안라였는데, 필시 가수 김안라와 동일인물로 보입니다.

집안에서는 그해 4월, 안라를 일본 도쿄로 서둘러 유학 보냈습니다. 김안라는 일본에서 무사시노음악학교와 닛본 음악학교를 다니다가 결국 분위기가 가장 안정되어 있던 도쿄의 중앙음악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여기서는 성악과와 중등과를 다녔는데 재학시절 유명성악가 교수였던 히라이 미나코(平井美奈子) 선생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식당일도 했고, 또 무대에서 조선유행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에 김안라의 활동소문을 접한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재빨리 취입제의를 해왔고, 이때 '낙화'와 '월하(月下)의 유선(遊船)' 등 두 곡을 불러 음반으로 발매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1932년 음악학교 재학시절에 나온 가수 김안라의 첫 데뷔앨범입니다. 비록 유행노래로 음반을 내긴 했지만 김안라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예술성과 대중성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으며, 장차 훌륭한 최고 소프라노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이 몰래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에론 발매음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 점차 뜨거워지자 레코드사에서는 몇 곡 더 취입해주기를 요청했고, 김안라는 향후 8개월 동안 위의 두 곡을 포함하여 '흰 돗대 간다', '조선 매기행진곡', '스무 하로 밤' 등 도합 5곡의 가요작품을 더 발표하게 됩니다.

시에론 음반이 장안의 화제가 되자 이번에는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취입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포리도루레코드사와는 전속계약을 맺었고 여기서는 1933년 3월부터 역시 시에론과 마찬가지로 8개월 동안 '청춘은 괴로워'를 비롯하여 '사랑의 옛터에서', '종로비가', '칠성기 날리는데', '콘도라의 노래', '그대여 보고 싶다' 등 5곡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시에론 발매음반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본명을 감추고 김활라(金活羅)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안라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취입했던 ‘두 목숨의 저승길’ Ⓒ이동순

김안라는 포리도루레코드사 전속가수 자격으로 1933년 8월8일 도쿄 양악연구회가 주최한 한반도 북선(北鮮)지역 일대 순회공연에 이승학, 오우현, 이광엽 등과 참가하게 됩니다. 다닌 지역은 웅기, 회령, 청진, 나남, 명천 등지의 북관(北關)지역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34년 8월에는 한반도의 남쪽지역 일대에 막대한 태풍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도합 787명이 죽고, 침수 붕괴된 가옥이 34,380채나 되었습니다. 선박피해는 375척이었지요.

그해 8월19일부터 일본에서는 도쿄의 유일한 조선인 극단 삼일극장 주최로 경교공회당에서 남조선 수해구제 구원공연이 열렸습니다. 김안라는 이 공연무대에 박경희, 신병균, 주성일 등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해 9월4일부터 양일간 도쿄의 본소공회당에서 열린 남조선수재민구제 동정 영화, 무용, 음악, ‘조선가요의 밤’에도 출연해서 공연수익금을 모두 수재민 동포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날 공연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예술인들, 이를테면 임헌익, 박경희, 안영자, 윤태섭, 최승희, 한성기 등이 모두 출연해서 재일동포 1500명 관중의 열광적 환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졸업을 앞두고 김안라는 오랜만에 고향 원산으로 잠시 방문하게 됩니다. 이때 오빠 김용환(1909∼1949)의 제의로 여동생 안라와 남동생 정구, 정현(1920∼1987), 아내 정재덕까지 모두 다섯 명이 함께 형제악단을 조직해서 동해안의 교회를 다니며 순회연주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 형제악단은 금강산의 온정리(溫井里)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원산으로 돌아왔는데, 김용환의 다정한 친구 김소동이 그들의 활동을 뒤에서 전폭적으로 도왔습니다. 당시원산 형제악단에 대한 동해안 주민들의 칭송은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습니다.

마침내 1935년 3월, 김안라는 중앙음악학교 성악과와 증등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그녀가 졸업하던 1935년 한 해는 가수 김안라에게 무척이나 바쁜 시간이 되었습니다.

김안라의 노래 ‘국경아가씨’의 음반과 홍보전단 Ⓒ이동순

졸업 직후 김안라는 일본의 도쿄 중화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신진음악인 소개연주회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 5월 초순에는 도쿄의 그 유명한 히비야(日比谷) 공회당 무대에서 제6회 전일본 신인연주회가 열렸을 때 무대에 등장하여 소프라노 가수로서 그동안 연마해온 성악가의 실력으로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춘희)' 가운데 아리아를 열창해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도 포리도루레코드사 전속가수의 신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던 상태라 김안라는 1935년 5월 17일부터 이틀 동안 도쿄의 본소공회당에서 열린 ‘조선유행가의 밤’에 동료였던 왕수복, 전옥, 김용환, 윤건영, 왕평 등과 함께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성악가수로서의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화려했으나 생활은 곤궁해서 도쿄 신주쿠의 야간무대 물랭루즈와 니치게끼(日劇)에서 가수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니치게끼에서는 '반도의 봄' 주인공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은 나중에 서울까지 그 세트를 가져와서 공연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일보 주최 음악회에 초청받아 김영일, 장비, 윤건혁, 임헌익(이규남) 등 일본유학파 성악가들이 김안라와 함께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1935년 8월 22일 김안라는 자신이 태어난 원산으로 돌아와 고향무대에서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그날 조선중앙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이 공연소식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원산이 낳은 천재 성악가 김안라(金安羅) 양의 독창회는 오는 24일 오후 8시 반부터 삼성 원산관에서 동업 조선일보원산지국 주최로 본보(조선중앙일보) 원산지국 후원 하에 수삼 인사의 찬조 조연과 안라 양의 옵바 김용환(金龍煥) 군의 총지휘하에 개최한다는데 일반은 만히 내청하기를 바란다 하며 안라양은 천재적 성악가의 풍부한 소질을 가지고 소학교 시대로부터 발성법과 음조(音調) 융합(融合)에 치중하여 오다가 일즉 동경에 건너가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야 성악과를 마치고 다시 동경중앙음악학교 중등과를 금년 3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얏스며 그후 금춘 독패신문 주최로 전일본 신인소개음악회에 출연하야 관중의 대환호리에 재삼의 박새를 바든 쏘푸라노의 명가수 그 일홈이 혁혁하다 한다.

1937년 7월 15일에는 도쿄에서 영화, 연극, 음악, 무용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예술가를 총망라한 도쿄조선영화협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김안라는 주영섭, 이해랑, 서두성, 김영길, 임호권 등과 함께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그해 9월 5일 동아일보 지상에 “예원인 언파레드”란 제목으로 대표적 양악 음악인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안라는 이인범, 장비, 김형구 등 성악가들과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가수로 명단에 오릅니다.

1940년 봄에는 오빠 김용환이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를 조직했을 때 연기부 단원으로 고복수, 송달협, 박단마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왕년 니치게끼(日劇)의 가수’ 특별출연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안라가 1940년이 저물어가던 이 시점부터 일본군국주의 체제를 위한 적극적 협력의 자세로 변신을 하는 광경이 보입니다. 그녀는 11월 7일 오후 4시50분 무용가 김민자와 함께 중국 북만주지역에 주둔하는 일본군위문을 위해 약 1개월 예정으로 하얼빈 일대를 향해서 경성 역을 떠납니다. 아마도 이런 무대에서는 '종군간호부의 노래'(김억 작사, 이면상 작곡)를 비롯한 군국가요를 열창했겠지요.

일제말 김안라의 대표곡 '종군간호부의 노래' 가사지 Ⓒ이동순

대포는 쾅 우뢰로 튀고
총알을 탕 빗발로 난다
흰 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자애에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전화에 흐트러진 엉성한 들꽃
바람에 헤뜩헤뜩 넘노는 벌판
야전병원 천막에 해가 넘으면
삭북천리 낯선 곳 버레가 우네

대포는 쾅 우뢰로 튀고
총알은 탕 빗발로 난다
흰 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자애에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쓸쓸한 갈바람은 천막을 돌고
신음하던 용사들도 소리 없을 제
하늘에는 반갑다 예전 보던 달
둥그러히 이 한 밤을 밝혀를 주네
-'종군간호부의 노래' 전문

작곡가 이면상이 행진곡풍으로 곡조를 붙이고, 시인 김억이 가사를 붙였는데 일본군가라든가 군국가요의 전형적인 특성과 분위기를 그대로 연상케 합니다. 소월을 문단에 발굴했던 안서 김억 시인이 이런 가사를 썼다니 참 뜻밖입니다. 김안라 또한 소프라노가수로서 왜 이런 방향으로 동원이 되었을까요? 그것이 자발적 동원이라는 것에 문제의 근원이 있는데, 이는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던 해에도 김안라는 그해 2월 14일 중국의 서주(西州) 지역 그곳 아세아가극단 초청으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위해 약 6개월 예정으로 순회공연 길을 떠납니다. 돌아오게 되면 조선고전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언론에 장래 포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8·15해방 후에는 김안라는 오빠 김용환이 주도하는 태평양악극단에서 오빠 김정구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후 뜻밖의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쳤지요. 이 때문에 가요계를 아주 은퇴하고 조용하게 숨어서 살다가 1974년 60세로 사망했습니다.

김안라가 박소성과 혼성듀엣으로 부른 '흘러간 분홍꿈' 가사지 Ⓒ이동순

가수 김안라가 음반으로 남긴 작품은 도합 23편 가량으로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이 가운데 동일한 노래가 두 번 음반으로 나온 경우를 제하면 22곡입니다. 대표곡으로는 '동무의 추억', '종군간호부의 노래', '국경아가씨', '흘러간 분홍 꿈' 등입니다. 악곡의 종류는 유행가, 유행노래, 유행소곡, 시국가(時局歌), 일본가요 등입니다. 활동음반사는 시에론(5편), 콜럼비아(5편), 포리도루(6편), 빅타(4편), 닛토(1편)입니다. 함께 했던 작사가로는 이하윤, 유도순, 김억, 산호암과 일본인 등전아등(藤田雅登)입니다. 작곡가로는 이면상, 삼의팔랑, 강구야시, 복부양일, 고하정남, T.W. 가든의 곡조와 함께 했습니다. 김안라와 함께했던 혼성듀엣가수로는 박소성(朴宵成)을 들 수 있습니다.

정통성악가의 꿈을 꾸다가 대중가수의 길로 바꾸었던 사례는 윤심덕(尹心德)의 경로와 흡사해 보입니다. 하지만 기생출신으로 대중가수의 길을 걷다가 아주 정통성악가로 변신했던 왕수복(王壽福)처럼 매우 특별한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양악 가수든 대중가수든 장르에 구애받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한 대중예술가로 자리 잡아 활동하면서 시대의 조류에 무작정 아무런 대책 없이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삶과 처신은 크게 잘못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정신의 남루한 얼룩은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 후대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알려지는 것입니다. 가수 김안라의 삶은 이런 점에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교훈과 시사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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