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요의 미디어 속으로]

[논객칼럼=이상요] 1992년쯤이었던 것 같다. 동대구역 플랫폼에서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 한 대학교 행사에서 특강을 마치고 귀경하는 길이었다. 한 사람이 지나가다 나를 보더니 반가운 듯 웃으며 다가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어떻게 여기 왔냐고 묻길래 이러저러해서 왔다고 했더니, 자기도 대구에서 특강 마치고 귀경하는 길이라고 했다.

2002년 11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권양숙 여사 출연방송을 시청하며 웃고 있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동대구역 플랫폼에서 만난 사람

1990년에 ‘야합 거부한 젊은 의원들’이란 KBS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1990년은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3당이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합당하면서 정치지형을 일거에 바꾸었던 해다. 통일민주당에서는 김영삼의 행보에 반발하면서 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 등이 탈당했다. 당시 3당 합당을 의결하는 통일민주당 의원총회 자료화면에는 격렬하게 항의하는 노무현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들은 이후 무소속 이철, 박찬종, 허탁과 합세해 소속 의원 8명으로 속칭 ‘꼬마민주당’을 창당한다.

여기에 가담한 40대 초중반의 젊은 국회의원 세 명과 대담한 내용을 편집해 방송했다. 노무현, 이철, 김정길 세 사람이 대상이었다. 김정길, 이철 의원은 의원회관에서 대담했다. 인터뷰라기엔 좀 길었다. 노무현 의원은 일정이 맞지 않아 저녁에 여의도 자택에서 대담했다. 자택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자택이 아니라 서울 숙소로 쓰고 있는 집인듯했다.

노무현은 김영삼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지금은 은퇴한 송기인 신부를 만났을 때 들은 얘기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YS가 송 신부에게 전화해 부산 지역에 출마할 후보 4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김광일, 노무현 두 사람에게 의향을 물었더니 김광일은 한다고 했고 노무현은 거절했다. 다시 YS의 독촉을 받고 재차 그를 설득하자 조건을 붙여 하겠다고 했다. 이왕 할거면 쎄게(?) 붙겠다면서 부산 동구에 출마하겠다고 했다. 동구 민주정의당 후보는 허삼수였다.

노무현이 허삼수를 이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는 허삼수를 누르고 당당하게 당선해 돌풍을 일으켰다. 초선의원이 되자마자 그는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전두환 정권 정경유착 비리 규명을 위한 ‘5공 청문회’에서 그는 전두환,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증인 심문하듯 날카롭게 추궁해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그러나 곧 3당 합당을 겪어야 했고, 이 길로 노무현은 YS와 헤어진다. 4년 후 1992년, 14대 총선에서 그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에 재출마했다. 상대는 13대 때 눌렀던 허삼수였고 그는 낙선했다.

“나 대통령 꼭 할낍니더.”

동대구역에서 그를 만났던 1992년경, 그는 스스로 백수라고 자처하고 다녔다. 기차가 도착하자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각자 자리를 찾아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가 나를 찾아왔다.

“여기 있었네요. 혼잡니까?”
“예”
“그라믄 식당 칸에 가서 맥주 한잔 합시더.”
“좋죠.”

식당 칸으로 옮겨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시켰다. 그가 주로 얘기했고, 나는 주로 맞장구를 치는 쪽이었다. 그때 나누었던 얘기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느낌은 남아 있다. 열정적이고 명석했다. 복잡한 상황을 관통하는 요점을 짚어내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가볍게 마시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김천쯤에서 마시기 시작한 자리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얘기를 했다. 수원쯤 도착했을 때는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그때 그가 얘기를 끝내려는 듯 말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말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 대통령 꼭 할 낍니더.”
“꼭 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게 맞장구쳤다.

1995년에 그는 부산시장에 출마해 낙선한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에서 낙선한다. 당선자는 이명박이었다. 그해 그는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했다. 흔히 ‘통추’라고 불렀다.

통추 시절인 1997년, 노무현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적이 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 제목은 ‘“이인제도 나가는데...” 노무현 “나도 출마”’였다. 이인제는 세대교체를 내걸었다. 노무현은 “3김 정치에 한 번도 저항하지 않은 이인제 후보는 세대교체를 논할 자격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먼저 심판해야 한다’는 통추 내의 강력한 비토로 그는 일주일 만에 대선 출마를 철회하고, 결국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한다.

그의 행보가 당시 나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의 의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승부수’가 필요했다.

역사를 향해 던진 ‘승부수’

1998년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 판결로 사퇴하고 치러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그는 당선한다. 6년여 낭인 생활도 끝났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를 버리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면서 출마한 부산 북·강서을에서 그는 또 낙선한다.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렀다. 명분이 있는 ‘큰길’만 걸었다. 어쩌면 이때의 낙선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승부수가 아니었을까?

16대 대통령 선거는 전 국민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대한 드라마였다. 선거 과정, 탄핵, 열린우리당 창당, 연정 제안 등 고비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승부수를 던졌다. 우리나라 정치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목표를 지향했고, 새로운 정치의식을 형성했으며, 관행과 제도들이 바뀌었다.

23일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년이었다. 도대체 그는 왜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을까? 왜 그런 죽음의 방식을 선택했을까? 노 전 대통령이 ‘천부적인 승부사’였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죽음이 그의 마지막 승부수였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을 위한 승부수였을까?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노 전 대통령을 기억하고 추모하거나 미워했을 것이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또는 흐르는 ‘물의 질’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승부수는 역사를 향했던 것이 아닐까?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분과 위원

  전 <KBS스페셜>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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