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화의 요즘론]

[청년칼럼=허승화]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을 갖고 있겠지만, 무엇이 나를 위로하는지 알아야 조금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다. 과연 사람을 위로하는 건 무엇일까. 한마디 말? 한 그릇의 밥? 한 잔 술? 한 번의 여행? 아니면, 한 권의 책?

Ⓒ픽사베이

내게 위로는 

십 대 시절, 나는 지금보다 오만했다. 당시의 나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에 대해서 알러지가 있었다.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혹은 어떤 영화를 보고 위로를 느낀다는 말을 비웃었다. 그때는 위로받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위로’라는 단어에 마음이 쓰였다. 다른 사람이 위로 받았다는 글이나 영화에도 관심이 갔다. 점점 그런 작품들을 찾아보게 됐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글로써, 혹은 작품으로써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더욱 발전된 형태의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랬다.

상처는 가만히 두면 덧난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란 그러한 상처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겹겹이 쌓이는 시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면 마치 피부가 그렇듯 나이가 들며 민감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상처받고 있지만 지금은 새로운 상처에 조금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기 보호 능력이 성장했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피하는 것이 많아졌다.

나에게 있어서 위로는 타인의 저작물을 ‘읽고 쓰는’ 것으로부터 왔다.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괴로움의 순간들은 늘 뜻밖이었고, 도무지 친해질 수 없었다. 고통은 볼 때마다 초면이었다.

낯선 순간을 견디기 위해서 그 고통을 아는 사람의 조언이 필요했다. 나는 내게 필요한 이야기를 책에서 얻을 수 있었다. 불현듯 찾은 몇 마디는 뜻밖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내가 조언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위로의 크기는 더 커졌다. 나보다 먼저 살다 간 이들이 먼저 겪고 적은 기록, 그게 바로 책이고 문학이었다.

극복의 글쓰기

외로움을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외로움을 고독이라는 단어로 치환해서 알아듣는다. 누군가에게 외로움은 벗어나야 할 상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독은 무언가를 탄생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옛날부터 작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독에 대해 강조해 써놓은 이유가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어떤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고비를 넘어서려면 계기가 필요하다. 어떤 이는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웃으며 넘어갈 거다. 그러나 나의 경우,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순간이 더욱 괴롭다.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야기하는 내 음성을 듣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나는 친한 친구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대신 글을 쓴다. 그게 일기든 에세이든 소설이든 뭐든 일단 쓰고 본다.

글은 전적으로 내가 쓰는 것이지만 제멋대로 엇나가기 어렵다. 바로 그 점이 글의 매력이다. 글을 시작할 때 마음과 글을 끝맺을 때의 마음은 사뭇 다르다. 글을 쓰고 나면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된다. 나는 글을 써보기 전에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글을 끝낼 때 희열을 느낀다. 옛날 서양 사람들 말로 카타르시스다.

글로써 무언가를 배설한 후, 시원함을 느끼며 노트북을 덮는다. 이 글은 누군가 읽어주어도 좋고 나 혼자 읽어도 좋다. 어쨌든 나는 표현했으니 비로소 넘어갈 수 있다. 글쓰기는 내게는 맞는 방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 있다.

각자의 위로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 할머니는 언젠가부터 ‘혼잣말’의 달인이 됐다. 할머니 곁에 가면 들릴듯 말듯 읊조리는 소리들이 귓가에서 윙윙거린다.

할머니는 분명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몸 깊숙이 스며든 외로움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 같다. 없애고 싶어도 이미 살갗에 아로새겨졌다. 할머니는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찾지 못하고 대신 ‘혼잣말’을 터득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매번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상처와 외로움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그래도 임재범이 부른 <여러분>의 가사처럼, 누군가 외로울 때 위로해주는 것은 늘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아닐까. 

허승화

영화과 졸업 후 아직은 글과 영화에 접속되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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