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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외국어 공부[안희진의 민낯칼럼]
안희진 | 승인 2019.05.30 10:26

[논객칼럼=안희진] 30여년 전 어느날, 하비에르(Javier)라는 교수와 함께 강원도 산골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특별히 가깝지는 않았지만 학생 때 인연으로 가끔 여행 정도 다니는 사이였다. 한국사람보다 한국말이 능통했던 스페인사람인 그는 커다랗고 깊은 눈에 높은 콧대, 마치 인도왕궁 파수꾼이 연상될 만큼 수염을 기른 190cm에 가까운 큰 키였는데, 그는 특히 ‘비율이나 배분 따위를 따지는 것’을 좋아했었다.

예를 들면, ‘배분은 5:5로 합시다’라고 말하는 경우, ‘엉? 5:5라고... 적당히 하면 되나... 확실하게 해야지... 그러면 5가 누구야... 대체 너야 나야?’ 하는 식의 어이없는 비율집착형 인간이었다.

Ⓒ픽사베이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경춘국도를 거쳐 강재구 소령이 산화했던 오음리 쪽을 향해 가다가 목적지였던 모 교회로 가는 길을 잃어 산골짜기에서 헤매게 됐다. 내비게이션은 커녕 지도조차도 부실했던 시절이었으니 난감했다.

그러나 강원도 산골에 흔해빠진 것이 군부대가 아닌가. 부대 위병에게 묻기로 하고 어떤 대대급 부대 앞에 차를 세웠다. 나를 밀치고 굳이 그가 위병소 앞으로 다가섰다. 우리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물었다.

하비에르: 군인아저씨. 수고하십니다.
군바리: (나직하게)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
하비에르: (작지만 낭낭한 목소리로) 고생 많네요. XX교회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군바리: (약간 찡그리며 큰소리로)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
하비에르: (상냥하게 웃으며) 아니... XX교회 가는 길 말입니다.
군바리: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우렁 찬 소리로) 영어를 못합니다.
하비에르: (당황하며 천천히) XX.교.회.가.는.길.좀.가.르.쳐.주.세.요.
군바리: (화가 난듯 마구 째려보며)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
하비에르: (더욱 천천히)XX...교...회...가...는...길...좀...알...려...달...라...구...요...
군바리: (절규하듯 거의 울부짖으며) 저는 영어를 못한다구욧!!!"
일동: 헉......

스페인 사람이 유창한 한국말로 천천히 말해도 이 지경이었던 시절이 불과 30여년 전인데... 요즘은 개도, 소도, 너도 나도 쏼라쏼라... 국민들의 외국어 수준도 높아졌고 세월이 많이 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외국어 그까이꺼 별 것 아냐. 사람 사는 게 똑같지” 하는 태도로 아무데나 끼어들어 잘난 척을 하며 일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학교에서 성적이야 점수로 평가가 가능했고, 밥 사먹고 술 사먹고 인사 나누는 정도야 외국어를 알든 모르든 간에 어떻게든 말을 할 수 있으니 그런 걸로 시비걸자는 게 아니다. 중요한 상담, 인간관계, 의향서나 양해각서, 협정, 계약 등등과 같은 중요한 일에 어설프게 끼어 일도 망치고 자기 자신도 망신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남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호주의 모 기관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함에 앞서, 월요일 밤에 급히 써놓은 초안을 대사관에 보냈더니 ‘이렇게 쓰면 안됩니다. 다시 쓰시거나 딴 사람 시키시지요’라는 부끄러운 회신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1979년 6월 원효로 함석헌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께서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며 내 어깨를 짚고 하신 말씀을 만고의 진리로 다시한번 확인하고 위안을 삼는다.

“시작하려면 끝내 최고로 해야 하는 것이 외국어인데, 적당히 해서는 그저 외국 녀석들 종노릇할 자격을 얻은 꼴일 뿐이다. 외국말 적당히 했다간 일 망치고 인생 망치고 세상 망친다. 무엇보다도 ‘대인이라면 모름지기 외국어를 해서는 안된다.’ 쓸데없는 외국어 걱정말고 너는 대인이 될 사람공부를 해야 한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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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진  anizi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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