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청년칼럼=시언] 내가 사는 ‘관악구 고시촌’에는 토킹바(Talking Bar)가 많다. 다른 동네에선 동에 하나도 찾기 힘들지만, 이곳엔 한 블록당 몇 개씩 있기도 하다. 바들은 주로 오후 10시쯤 가게 문을 여는데, 새벽 4시 장사 종료 전까지 2~30대 남자들이 하나 둘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고객들은 젊은 바텐더들과 맥주나 양주를 사이에 둔 채 대화를 나눈다. 터치 등 퇴폐적인 요소는 없다. 물론 바텐더들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며 근속 기간도 짧다.

하루는 예비 취재 차 바 2~3곳을 돌며 바텐더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녔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일간지 인턴 기자로서 ‘나만의 스토리’에 혈안이 됐던 때였다.

본디 옳은 취재란 선입견이나 섣부른 결론 도출 없이 청취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당연하게도 ‘남자들은 허세 부리기 바쁠테고 바텐더는 적당히 받아주느라 애먹겠지’하고 짐작한 채 취재에 임했다. 이미 기울어진 내 질문에 한 바텐더는 반은 맞다고 확인하며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더했다. “근데 자기가 점심에 뭐 먹었는지 같은 소소한 거 얘기하는 손님도 많아요” 믿기 힘들었다. 지갑 얇은 고시생들이 맥주 한병당 최소 9000원인 곳에 와서 점심 반찬의 맛 따위를 토로한다니. 그러고보니 바를 찾는 고객들은 슬리퍼에 츄리닝 차림이 많았다.

Ⓒ픽사베이

고시촌을 이루는 관악구 대학동과 서림동은 대한민국 특유의 고시 문화가 키운 도시나 다름없다. 두 동네 간 임무 분담도 철저하다. 찻길 하나를 사이에 둔 대학동과 서림동은 전자는 학원과 술집, 후자는 철저한 원룸 주거촌으로서 기능한다. 공무원의 꿈을 품은 전국의 청년들이 모여 낮에는 학원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고, 밤에는 술집으로 흩어져 알곱창에 소주를 마셨다. 얼굴이 불콰해진 고시생들은 보통 12시를 넘기기 전에 조용히 길을 건너 서림동 원룸방에 몸을 뉘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해야 할 공부는 끝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도 같이 술을 마심 신세 한탄이라도 할 수 있는 고시생들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술이라는 것도 같이 마실 사람이 있을 때나 즐길 수 있지 않나. 서울권 대학을 나온 고시생들과는 달리 지방대 출신 고시생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란 편의점 아르바이트에게 “영수증 버려주세요” 한 마디 건네는 정도다. 서림동에 가득한 토킹바의 주 고객이 2~30대 고시생인 이유도 그래서였다. 고시생도 사람이니까. 내가 오늘 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누구 한명이라도 궁금해하고 들어줬으면 하는 근원적 갈증이 그들에겐 있었다. 들어줄 친구나 가족이 없다면, 1500원 짜리 맥주를 9000원에 사면서라도.

이 얘기를 아는 고시생형에게 하자 그는 쓰게 웃으며 한 마디를 보탰다. “맞아. 나도 4일씩 말 안하고 혼자 있으면 반대로 혼잣말이 늘더라고. 그럴때면 한번씩 그런데라도 가서 털어놓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맞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간에겐 결국 타인이 필요하구나. 철학과 1학년 때 배웠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부한 명제를 나는 새삼스레 되새겼다.

한 소설가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채울 수 없는 구멍이 하나씩 뻥 뚫려 있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구멍을 메우고자 발악하는 것이 인생 같다고도 했다. 그렇다. 오늘도 고시촌 토킹바는 성업 중이다.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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