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20]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1617년,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의 남도(藍島)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떤 여자가 종이쪽지를 일행에게 던졌다. ‘언문’으로 쓴 편지였다.

편지를 던진 여자는 전라도 순창에 있는 남산 뒤에 살던 권 목사(牧使)의 손녀였다. 왜란 때 15살에 끌려와서 비(婢)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호피(虎皮)’를 귀하게 여기니, 호피 한 장만 ‘몸값’으로 내면 풀려날 수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이 여자의 몸값은 ‘호피 한 장’이었다.

왜병들은 조선 사람을 짐승처럼 새끼로 목을 옭아매서 ‘몰고’ 갔다. 잘 걷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렇게 끌려가서 노예상인에게 팔렸다.

왜병들은 포르투갈 노예상인과도 거래를 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떼돈’ 좀 만져볼 작정으로 왜군이 주둔하는 조선 남부지방에 노예매매선인 ‘인매선(人買船)’을 보내 조선 사람을 ‘대량’ 확보하기도 했다. 가격은 여자와 어린아이의 경우 2∼3문 정도였다고 했다. 조총 한 자루가 120문이었다.

Ⓒ픽사베이

병자호란 때도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짐승’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가축처럼 매매되었다. 가격은 ‘은(銀) 18냥, 또는 우(牛) 1두’였다. 소 한 마리 값에 거래된 것이다.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름도 필요 없었다. ‘노예 명부(名簿)’에 “박 일(朴一), 박 이(朴二), 박 삼(朴三)…” 하는 식으로 올렸다. ‘한×, 두×, 세×’ 등으로 헤아린 것이다.

남에게 선물로 줘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죽여도 그만이었다. 범죄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때려죽인다는 소문 때문에 가족들은 조바심을 했다. 몸값을 물고 ‘속취’시키려고 했다.

그랬더니 몸값이 치솟았다. 평안도 의주에서 열린 ‘포로 속취(贖取)시장’에서는 몸값이 우(牛) 10두(頭), 또는 마(馬) 10수(首)로 뛰었다. 은, 목면, 짐승가죽 등으로 치를 경우에는 거의 1000냥 정도를 들여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시장’에 나온 조선 사람 200여 명 가운데 겨우 70명 정도만 몸값을 물고 풀려날 수 있었다. 나머지 조선 사람의 가족은 ‘낙담하여 통곡하며’ 돌아서야 했다.

병자호란 후인 1639년 사신 이원진(李元鎭)은 조선 사람이 수용되어 있는 ‘가축우리’를 목격했다.

“목책을 가로세로 얽어 두른 데다 진흙으로 칠을 해서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조선에서 잡혀온 남녀 60∼70여 명이 갇혀 있었다.… 조선 사신 일행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여자 10여 명이 뛰쳐나와 문지기 병사에게 쫓기며 고함쳤다. ‘어느 고을 누구의 딸이다. 아내다. 소식 전해 달라’며 통곡했다. 어떤 포로는 한쪽 귀를 잘렸는가 하면, 어떤 포로는 발의 근육 잘라내는 단근질을 당하는 바람에 걷지도 못했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 징용에 끌려간 조선 사람 역시 사람이 아니었다. ‘군수품’이거나 또는 ‘소모품’이었다.

사람 취급을 해줄 리가 없었다. ‘먹이(?)’부터가 비참했다. ‘일반적인 급식’이라는 게 쌀알이 드문드문 박힌 콩밥이었다. 주먹만 하게 뭉친 콩밥이었다. 또는 무와 홍당무가 섞인 밥이었다. ‘말먹이’와 닮은꼴이었다.

그런 ‘먹이’로 하루 12∼14시간의 강제노동을 견딜 재간은 없었다. 영양실조에 걸리고 질병으로 쓰러져야 했다. 그러면 꾀병을 앓는다며 매질이었다.

그래도 ‘군수품’이었으니 ‘보관’만큼은 중요했다. ‘분실’하지 않으려고 합숙소를 산간이나 해안, 절벽 같은 곳에 만들었다. 창에는 창살을 설치하고 출입문은 밖으로 잠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방울까지 달고, 개를 풀어서 지켰다. 하루에 점호를 3번씩이나 받도록 했다. ‘도망 방지용’이었다.

사람이 아닌 군수품에게 ‘이름 석 자’를 제대로 불러줄 이유 따위는 없었다. 일제는 자기들의 지명(地名)을 적당히 따서 조선 사람의 성(姓)으로 삼았다. 여기에 ‘일랑(一郞)’에서 ‘십랑(十郞)’ 등의 이름을 멋대로 달았다.

‘후쿠오카(福岡)’라는 곳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의 이름은 “후쿠오카 이치로(福岡一郞),… 후쿠오카 주로(福岡十郞)”가 되고 있었다. ‘후쿠오카 한×, 후쿠오카 두×, 후쿠오카 세×… 후쿠오카 열×’ 등의 일련번호였다.

더 있었다. 1907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구경한 조선 유학생이 그해 6월 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쓴 글이다.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열린 ‘명치 40년 박람회’에 입장료 15전을 내고 막 들어가는데, 구경을 마치고 나오던 일본 사람 몇몇이 ‘조선 동물 2개(朝鮮動物 2個)가 전시된 게 우습다’고 했다. 조선관을 찾아갔더니 입구에 호랑이 가죽 2수(首)가 걸려 있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것이 그 ‘조선 동물’인가 여겼다. 다른 동물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학생은 계속 썼다.

“그런데 조그만 관(館)이 하나 더 있었다. 입장료는 ‘대인 10전, 소인 5전’이었다. 컴컴했다. 들어가 보니, 희미한 광선 아래 남자 한 명이 상투 틀고 갓 쓴 채로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대구 사는 김가(金哥)’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장옷을 머리에 쓰고 눈동자만 내놓은 여자 한 명도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조선 동물’이었다.…”

일본은 박람회에 멀쩡한 ‘조선 사람’을 구경거리로 전시하면서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유학생은 ‘먹물’이 아닌 ‘눈물’을 찍어서 글을 쓰고 있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은 ‘강제 위안부’ 문제뿐일 수 없다. 따지고 넘어갈 일은 많다.

우리가 몸값을 받은 ‘과거사’는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그나마 고구려 역사가 말살되면서 자료가 적다.

고구려 태조왕은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습격했다. 이때 잡아왔던 포로를 몸값을 받고 돌려주고 있었다. 성인은 1인당 ‘비단 40필’, 어린아이는 ‘반값’이었다.

포로들을 ‘포로수용소’인 ‘내원성(來遠城)’에 가두기도 했다.

“내원성은 정주에 있으니(來遠城在靜州), 강 속에 있는 섬이다(即水中之地). 투항해온 오랑캐를 머물게 하면서(狄人來投置之於此) 내원이라고 했다(名其城曰來遠). 노래를 지어 이 사실을 남겼다(歌以紀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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