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쌤, 이거 왜 배워야 하죠?”

25년 전 내 질문에, 선생님은 대답했다. 다 배워보면 알 거라고, 나이 들면 알 거라고. 그러나 그 선생님의 나이가 되어서도 모르겠다. 수학은 수능 직후 인수분해 되었고, 나는 시는커녕 소설도 감상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내 학생들도 그 시절 나처럼 물었다. 나는 이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대학가려고.”
짧막한 한 마디면, 학생들은 납득했다.

“꼬우면 자퇴하고 엄마한테 건물 하나 사달라고 하든가.”
쐐기를 박았다. 학생들은 꼼짝하지 못했다. 인성교육, 전인교육은 말뿐이었다. 내 선배들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교육의 실질 목적은 일관되게 대학입시였다.

대입 준비와 공부는 달랐다. 공부는 배우고 익혀 자신을 신장시키는 것이다. 절차적 즐거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입은 견디고 견뎌 아무튼 점수를 높이는 일이다. 성적이 오를 때 기쁘지만 성적은 끊임없어 올라야 해서 기쁨은 빨리 휘발된다. 성적표를 받아든 순간, 더 높은 성적의 이상 자아를 닭 쫓던 개처럼 바라보며 현실자아는 또 오그라드는 것을 우리는 무수히 경험했다.

Ⓒ픽사베이

대입의 패러다임 안에서 성진이는 그저 그런 학생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당했다. 내가 존경할 구석이 있는 학생이었다. 그가 공부하는 이유는 성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만났던 학생들 중에서 가장 대학에 어울리는 공부를 했다. 

성진이는 자기주도성이 강했다. 자기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수행 평가를 대하는 자세부터 달랐다. 학생들은 보통 어떤 주제가 주어졌는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내가 떠먹여 주고 학생들이 보조했다. 그러나 성진이는 자신이 정한 과제의 정교한 개요를 보여주며 어떻게 수정하거나 보충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성진이가 내놓은 오리지널리티에 내가 보조하는 형국이었다. 내가 방향성을 잡아주는 경우, 성진이는 자기 것을 더해 깊이 파고 들었다.

성진이가 완성한 과제는 어지간한 대학 레포트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위키백과를 복사․짜깁기 한 것이 아니라 원전을 찾아 들어갔다. 한 번은 논술 과제가 엉망인 날이 있었다. 그날은 윤리 관련 논문 40여 개를 읽은 직후라 머리가 멈춘 것 같을 때 논술 과제를 했다고 했다. 나는 미친 놈이라고 타박했지만 녀석이 대견했다. 그날, 성진이 같은 학생이 대학에 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기본적으로 성진이는 그런 식의 공부를 즐겼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책을 찾고(책장에 책이 빼곡했다), 책을 읽던 중 관심사에 따라 다른 책으로 파도타기해 들어가며 지식의 외연을 넓혀 갔다. 심화하고 싶으면 논문을 찾았고, 막히거나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나를 비롯한 선생들에게 물었다. 칸트의 ‘한갓된 파괴의 성벽’이 이해되지 않아 담당 선생님에게 물었다가 굳이 알 필요 없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이 지적 호기심을 더 자극했는지 『윤리형이상학』을 찾아 2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친구들과 공유했다.

성진이를 보고 있으면 해묵은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대학은 공부하는 사람이 가야 하는가, 취업하고 싶은 사람이 가야 하는가? 딱 부러지게 답하기 힘들 것이다. 이상과 현실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늘 적정 수준에서 공존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요즘은 취업 쪽으로 쏠린 듯하다. 명문대에서조차 대기업 채용 조건으로 학과가 신설되었고, 인재가 몰렸다. 그래서 성진이가 더 돋보였다. 성진이는 자기가 하는 걸 왜 배워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반문했다.

“재밌지 않아요?”

물론, 내신 이야기는 아니다.

성진이를 통해 학생부종합전형의 취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삶을 숫자로 치환하는 것의 폐해는 다들 수능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밟은 허무함으로 느꼈을 것이다. 겨우 하루를 위해 온 인생을 소모했다는 허탈함 때문에 해방감은 생각보다 개운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학종은 숫자를 키우는 ‘소모전’에서 벗어나 진짜 공부하는 ‘삶’으로 유인 동기를 제공했다. 물론 대학이 취업 학원으로 서열화 된 현실과 충돌하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현실 반영만 할 수는 없다.

학종은 자기주도성, 전공적합성, 발전가능성, 인성으로 학생을 평가한다. 투명성, 형평성과 관련된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학종을 밀어붙이는 것은 나름 신뢰할 만한 인재 선발 도구로 검증되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신뢰할 수 있는 도구를 내게 적용해 본다. 인생대학(행복학과든, 성공학과든)에 입학하고자 한다면, 나의 합격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밥벌이의 타성 속에서 오직 연봉만으로 발전가능성을 계산하는 모습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걸 왜 하지?’에 대한 대답은 ‘돈 벌려고.’ 아니던가? 자기주도성은 사회생활 할 줄 모르는 젖비린내고, 전공적합성은 세상의 험준함을 모르는 낭만적인 소리다. 인성은 페르소나에 눌려 납작해졌다. 정도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도긴개긴. 합불을 따져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 인생부는 돈대학 장학생 전형에 어울릴 법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 가 울림이 크다면, 아마 인생부 종합 전형 준비가 착실하지 못했음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돈을 빼면 남는 게 없을 테니까. 인생은 수능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얄리얄리얄라셩이나 미적분처럼 잊히면 안 된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재밌지 않아요?’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러고 싶다.

성진이를 닮아보려 한다.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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