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세상구경]

[논객칼럼=허영섭] 핸드폰으로 주고받는 대화방마다 ‘알수없음’님의 행렬이 이어진다. 일단 모임이 결성되어 연락처가 작성되면 으레 단톡방이 뜨기 마련이지만 도중에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내거는 이름이 바로 ‘알수없음’이다. 동창회나 사우회, 향우회 등 친목 모임에서의 사정이 모두 비슷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노출시켰다간 ‘이탈자’라고 구설에 오르지 않을까 은근히 켕기는 탓일 것이다. 모처럼 동료들끼리의 식사모임에 참석했다가 불가피하게 일찍 자리를 뜨면서 뒤통수에 쏠리는 눈총을 의식해 본 경우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대화방을 빠져나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음은 물론이다. 모임의 운영 취지나 방식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에서라면 굳이 ‘알수없음’이라는 익명으로 가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른 회원들이 자랑처럼 주절주절 늘어놓는 수다놀이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단호한 의지 표명일 수도 있다. 그래도 대체로는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남들이 빠져나가는 틈을 타 같이 탈퇴를 결행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해준다.

Ⓒ픽사베이

대화를 통해 회원들 간의 친목을 도모한다는 취지에 있어 대화방만큼 편리한 방법이 더 없는 것도 사실이다. 카톡과 라인, 밴드, 링키드인, 인터넷 카페 등이 그 무대를 제공하고 있거니와 취향에 따라서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동원되기도 한다. 이른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전성시대다. 심지어 중고생이나 초등학생들까지 핸드폰을 통해 또래들의 집단대화 모임에 참여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적어도 의사소통 방식에 있어서는 하나도 뒤질 게 없는 세상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의사소통 수단이 봇물을 이루는 시대에 근본적인 의문부호를 던지는 게 바로 ‘알수없음’님의 존재다. 더구나 하필이면 ‘알수없음’이라는 이름일까. 자신의 탈퇴에 대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다. 그나마도 온라인상에서 ‘친구’나 ‘이웃’ 관계를 맺어 서로 ‘좋아요’를 눌러주다가 어느날 작별인사도 없이 빠져나가는 경우에 비한다면 나름대로 흔적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원들 아무나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이 마련됐다고 해도 그 역시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화방이 개설되고 처음에는 서로 격식을 갖춰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대화가 펼쳐지게 되지만 결국 그 안에서도 주도층이 생기고 위계가 형성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 질서와 분위기를 깨트리는 대화는 용납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남들 대화에 헛기침하듯 이모티콘이나 날리면서 존재감을 표시하다가 탈퇴를 결행하게 된다. 최근 일부 연예인들의 경우에서 드러났듯이 대화방을 통해 서로 야릇한 동영상이나 주고받는 경우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 쓰잘데 없는 얘기들이 오가게 된다면 메시지가 입전되면서 수시로 울려오는 전자음에도 공연히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내 경우에도 몇 가지 사례가 없지 않다. “올 한 해 재밌게 지내자”며 외롭게 남아 있는 친구들끼리의 단톡방 메시지가 그것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누군가가 올린 글이지만 어느덧 반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그 정도뿐이다. 물론 몇몇 친구와는 별도로 전화 연락이 이뤄지고 있고, 만나서 술잔을 나누기도 했지만 대화방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 상황이다. 대화가 겉도는 바람에 탈퇴한 어느 대화방에서는 다시 초대해 놓고도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조차 아직 없다. 이쯤이면 대화를 하겠다는 건지, 견뎌볼 때까지 견뎌보라는 고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새로 명함을 교환한 상대방의 이름을 핸드폰에 입력하면서 과연 앞으로 통화할 기회가 생길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존에 입력된 이름들을 살펴보면서 도대체 언제, 어디서 만난 사람인지 기억이 흐릿하거나 겨우 기억이 난다 해도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지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를 기억하는 상대방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화방에서 미련없이 떠나가는 ‘알수없음’님들의 처지가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는 이유다.

정치인들의 입버릇이 아니라도 소통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각자 추구하는 목적은 다를지언정 자신을 남에게 이해시키려 들고, 이해받는 만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면 사회적으로도 화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이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추구하는 이상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각 모임마다 운영되고 있는 인터넷 대화방이 그 증거다. 오늘도, 내일도 대화방에서는 “알수없음님이 나갔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이어질 것이다.

 허영섭

  뿌리깊은나무 기자 

  전경련 근무

  현 이데일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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