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논객칼럼=이동순] 한국가요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가수들로서 나이 여든이 넘도록 장수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재 가장 오래 생존하고 계신 인물로는 1920년생으로 99세를 넘긴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2019년 봄, 98세로 작고한 작사가 유호 선생이 있네요. 2012년 봄에 타계한 작사가 반야월(진방남) 선생은 96세까지 사셨습니다. 작곡가 이병주 선생도 93세까지 사셨으니 장수를 누리신 분입니다. 여성가수로는 2006년에 94세로 세상을 떠난 가수 신카나리아(본명 申景女;1912∼2006)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명이 예뻤던 가수이지요. 귀여운 소리로 밝고 경쾌하게 지저귀는 새장 속의 카나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특이한 이름입니다.

가요계의 원로들 중에 여든을 넘긴 분들도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작고한 손인호, 금사향 여사를 비롯하여 생존하고 있는 안다성, 명국환, 한명숙 등이 모두 여든을 훨씬 넘겼습니다. 반야월 선생은 말년에 청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방송 출연을 아예 사절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만 신카나리아는 나이 아흔까지 무대에 섰던 놀라운 기록의 보유자로 기억이 됩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당시 TV를 보면서 너무 노쇠한 가수 신카나리아의 애달픈 모습에 놀라움보다는 탄식과 비감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었지요.

신카나리아 Ⓒ이동순

오늘은 신카나리아, 즉 신경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녀는 191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원산은 한국음악사에서 대표적 거장들을 배출한 유명한 고장입니다. 김용환, 김정구, 김정현, 김안라, 정재덕 등 대중음악계의 뛰어난 음악인 가족들도 모두 원산 출생입니다. 유명한 성악가 이인범, 이인근, 이옥현 남매들을 비롯하여 작곡가 이흥렬도 원산이 고향입니다. 강원도 통천 출생의 작사가 박영호는 청소년 시절, 거의 원산에서 머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릴 적 신경녀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사랑을 독차지했건만 원산의 루씨여자고보(樓氏女子高普)를 1학년까지 다니다 결국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음악적 재능을 달랠 길 없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테너 이인근의 누이동생 이옥현에게 성악의 기초를 지도받았습니다.

원산의 명문 사학 루씨여고 전경 Ⓒ이동순

신경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 극작가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이동악극단 성격의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가 함흥 지역에서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원산의 유일한 극장시설이었던 원산관(元山館)으로 들어왔습니다. 신경녀는 날마다 조선예술좌 배우와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다녔고, 그들의 연기와 노래에 깊이 도취되었습니다.

신경녀는 기어이 무대 뒤로 용기를 내어 임서방을 찾아가 대중예술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신경녀의 자질을 테스트 해본 단장 임서방은 맑고 깨끗한 음색과 귀염성스러운 자태에 호감이 느껴졌습니다. 신경녀의 노래는 그야말로 새장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 어여쁜 카나리아가 들려주는 환상적 아름다움으로 들렸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예술좌 합류를 흔쾌히 수락하고, 이후 맹렬히 연습을 시켰습니다. 이 발탁의 과정에는 임서방 개인의 취향과 특별 배려가 작용했음은 물론입니다.

이로부터 신경녀는 무대 위에서 임서방이 지어준 예명 신카나리아로 불리었고, 조선예술단과 신무대악극단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혹은 막간가수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신카나리아의 첫 데뷔곡은 17세에 취입한 '뻐꾹새'와 '연락선'이란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들의 반향을 크게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정숙이 불렀던 '낙화유수'('강남달'의 원래 제목), '강남제비' 등을 악극단의 막간(幕間) 무대에서 신카나리아가 너무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오히려 원곡을 부른 가수보다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카나리아는 나이 20세가 되기까지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듯합니다. 1932년 동아일보의 기사 한 토막은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줍니다.

연극시장에서 아직까지도 아모 지장이 없이 곱게 피고 있는 방년 십칠 세의 귀여운 존재…신카나리아 양은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의 리듬처럼 청아한 목소리를 가졌다. …연기에 있어서는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 곱고도 정돈된 그의 얼굴이 스테지에 나타날 때에는 관객의 시선은 그의 연기보다도 미모에 집중되는 경향이 잇다

신카나리아 노래 ‘님 생각’(왼쪽)과 ‘월야의 탄식’의 가사지. Ⓒ이동순

19세 이후로 신카나리아 가수로서 발표한 작품의 제목들은 '한숨고개', '사랑아 곡절업서라', '무궁화 강산', '웅대한 이상', '공허에 지친 몸', '눈물 흘니며', '녯터를 차저서', '돌녀주서요 그 마음', '사랑이여 굽히자 마소', '월야의 탄식' ,'원수의 고개', '밤엿장사', '꽃이 피면', '님 생각', '선창의 부루스', '상해 여수'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 '무궁화 강산'(전수린 작사, 전수린 작곡)이란 노래는 광복 이후 '삼천리강산 에헤라 좋구나'로 제목이 바뀌었고, 신카나리아가 무대 위에서 항시 즐겨 부르던 자신의 애창곡이었습니다. 일제강점 체제에서 ‘봄’ '무궁화’ ‘삼천리강산’ 등속의 단어들이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禁忌語)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된다 할 것입니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이 내 청춘 다 늙어 가누나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와요
무궁화 강산 절계 좋다 에라 좋구나

강산에 새봄은 다시 돌아와도
내 가슴에 새봄은 왜 아니 오나요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와요
무궁화 강산 절계 좋다 에라 좋구나

세월은 한해 두해 흘러만 가는데
우리나라 남북통일 언제나 오려나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와요
무궁화 강산 절계 좋다 에라 좋구나

-'삼천리강산 에헤라 좋구나' 전문

낭랑하고도 구슬픈 음색으로 들려오는 '밤엿장수'도 한번 들어볼 만한 노래입니다.

1930년대의 몹시 추운 한 겨울 깊은 밤, 골목에서 들려오는 밤엿장수의 쓸쓸하고도 처량한 외침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합니다. 식민지시대 밑바닥 삶으로 전락한 당시 민초들의 서글픔과 전형적인 애수가 물씬 풍겨나는 '밤엿장수'의 정서와 가락에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밤엿 사려 밤엿 사려
후추양념 밤엿장수 눈보라 치는 밤
허덕 허덕 기운 없이 떨며
걸어서 나오네

밤엿 사려 밤엿 사려
후추양념 밤엿장수 쓸쓸한 이 밤에
거리 거리 에우면서 끝없이
걸어서 다니네

-'밤엿장수' 전문

다채로운 모습의 신카나리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데뷔 시절의 모습, 1950년대 무대공연, 30대 시절의 신카나리아와 그녀의 필적, 만년의 모습. Ⓒ이동순

신카나리아가 주로 음반을 발표했던 레코드회사는 시에론레코드였습니다. 가수 신카나리아에게 노랫말을 주었던 작사가는 천우학, 김희규, 전임천, 임창인, 유일, 임서방, 유도순, 노자영 등입니다. 이 가운데 유도순과 노자영(노춘성)은 식민지 조선시단에서 활동하던 낭만주의 계열의 현역시인들입니다. 임서방은 줄곧 신카나리아의 매니저 겸 후견인으로 도움을 주던 끝에 결국 부부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신카나리아 노래의 작곡을 담당하던 대중음악인은 유일, 전수린, 안영애, 이재호 등입니다.

시에론레코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신카나리아는 신은봉과 더불어 시에론 최고의 음반판매수를 자랑하는 대표가수로서의 위상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12인치 음반 한 장의 가격이 1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카나리아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인기를 집중시킨 음반을 당시 용어로는 ‘절가반(絶佳盤)’이라 부릅니다. 이 용어는 실제로 음반 상표에 표시되기도 했는데, 신카나리아의 음반 중에는 이 ‘절가반’이 여러 장이나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업고 신카나리아는 요즘의 만담과 비슷한 스켓취, 혹은 넌센스 종류의 음반도 가끔 취입하다가 1934년 리갈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겼습니다. 리갈은 보급판 스타일의 저렴한 민요 음반을 집중적으로 발매하던 콜럼비아의 계열회사였습니다.

신카나리아의 신보가 소개된 광고전단 Ⓒ이동순

1938년 이후 신카나리아는 음반 발표보다 악극단 공연에 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빅타레코드사의 악극단, 중국 천진의 악극단, 신태양악극단, 포리도루실연단, 라미라악극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극단 멤버로 활동하며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후견인이었던 임서방과 이별하고, 이익(예명 김화랑)과 재혼했습니다. 신카나리아 부부는 새별악극단을 창립하여 전국을 순회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카나리아는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공산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미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다수의 인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행렬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혼란을 틈타 신카나리아는 재빨리 남쪽을 향해 탈출의 뜀박질을 했고, 기어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극적인 기사회생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후 신카나리아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장병위문단의 멤버로 군부대 위문공연에 열중했습니다.

무대공연을 마치고 남인수, 김정구, 이봉룡 등과 함께 Ⓒ이동순

1972년 회갑을 넘긴 신카나리아는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카나리아다방’을 열고 옛 동료가수들과 어울려 추억담을 즐겨 나누며 소일하게 됩니다. 한국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예명을 썼다는 가수!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한복차림이던 신카나리아! 그 특유의 간드러진 음색으로 90세까지 기꺼이 무대에 오르던 직업적 천품(天稟)의 가수는 마침내 94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올랐습니다. 그녀가 남긴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식민지라는 거대감옥에 갇힌 백성들의 슬픈 삶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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