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너 이거 기억나니?”

장마 직전의 새벽은 스산했다. 불면으로 얼룩진 베갯머리가 짜증스러워질 무렵, 엄마는 뜬금없이 사진 한 장을 전송해왔다. 구겨진 지퍼백에 터지도록 담긴 50개 가량의 편지 뭉치 두개를 나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5년 전 군대 시절, 당신과 내가 주고받은 손편지들이었다.

아들의 훈련소 입소를 앞둔 어느 엄마가 심난하지 않겠느냐마는 정작 당신의 좌절은 다른데서 왔다. 바로 입영 대상자는 훈련소에 종교 서적을 제외한 그 어떤 책도 반입할 수 없다는 규정이 그것이었다. “우리 애는 책을 읽어야 되는데...” 우리 아들은 너무 고귀해서 책 같은 고급 문화와 접속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젠체가 아니었다. 유달리 책을 사랑해 책 속 구절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고된 생을 통과해왔던 당신이었고, 아들은 그런 당신을 빼다 박았다. 군대라는 극도로 폐쇄된 사회에서 빈번히 절망할 당신의 아들이 책에서조차 위안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입소 하루 전, 엄마는 묘책을 내놨다. 당신이 매주 편지와 함께 시(詩)들을 필사해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설마 어미가 제 자식한테 보내는 편지까지 검열할까”. 김종삼, 윤동주, 김수영,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수호 부적을 동봉하듯 손수 필사한 시들을 전역 직전까지 보내왔다. 김종삼 시인의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 사노라면 / 많은 기쁨이 있다고” 같은 시구는 지금껏 암송하는 인생의 문장이 됐다. 어떤 편지에는 쏟아지는 졸음이 당신의 펜을 밀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언

나는 당신의 편지들을 지퍼백에 담아 군복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축적된 편지가 50장을 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군대라는 조직은 부조리했고, 경직됐으며, 박탈당한 순간들의 모음이었다. 그런 시기를 통과해야만 대한민국 국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불만들이 화병처럼 치솟을 때면 당신의 편지를 꺼내 시들을 읽었다. 그래서 지금도 내 예비군복 건빵 주머니는 멋들어진 주름들이 모두 터진 채 그저 불룩하다. 이것만 있으면 살아지리라. 시(詩)라는 엉터리 부적에 담긴 당신의 마음과 함께 나는 고된 21개월을 견뎠다. “나는 너랑 군생활 21개월 같이 했다고 봐야 돼”. 당신의 농담이 농담만은 아님을 나는 알았다.

고백컨대 요사이 힘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쳐있었달까. 불면증이 도졌고 생활 패턴도 덩달아 엉망이 됐다. 자려고 누우면 이마 언저리에서 치고받는 내 안의 소음들이 시끄러워 몇 시간이고 유튜브를 보고서야 간신히 잠들곤 했다. 문득 사람이 그리워 오늘 만나자고 벙개 약속을 뿌리다가도 막상 술자리가 파하고 돌아오는 새벽의 길가는 공허했다. 어느새 ‘행복’이란 두 글자는 SNS 스타들의 일기를 빙자한 자기 자랑 안에서나 읽을 수 있는 단어가 됐다. 매일 달리지라도 않으면 정말 무너져 버릴까 두려워 한달에 170km가량을 달렸다.

엄마가 보내온 편지 묶음 사진은 이런 내게 두 가지 진실을 일깨웠다. ‘너는 암흑 같았던 군대 시절을 무사히 졸업할 만큼 강한 사람이다’라는 점과, ‘네가 무슨 일을 겪든 함께 고민하고 떠안아줄 가족이 있다’는 점이었다. 힘들다는 말 같은 거 제대로 한 적도 없는데, 450km 넘게 떨어져 있는 당신은 아들의 우울을 무슨 수로 알아챘을까. 당신이 베푼 사랑을 되갚을 날이 과연 올까. 나의 염려마저 예감했는지, 당신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로 짧은 대화를 마쳤다. 조건은 그게 다였다. 행복해 질 것.

길은 험난하리라. 행복이란 단어와 내외한지 오래고 반대 방향으로 내달려온 관성의 힘은 소처럼 우직하다. 재정 상태나 거주 공간 등 주위 환경도 내일이나 모레나 대동소이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해짐을 의무로 알기로 한다. 당신을 빼다박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며, 당신의 변함없는 지지와 응원의 조건이 ‘나의 행복’인 까닭에.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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