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청년칼럼=이광호] 세상은 나 없이도 잘 굴러갔기에, 내 자리를 유지하려면 나도 데굴데굴 함께 굴러야 했다. 자전하는 지구와 함께 떽데구루루.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루 종일 굴러야 하는 삶이었다. 하루 종일 열심히 구르고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려보면 세상은 제자리. 그나마 그건 열심히 굴렀을 때 이야기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몸이 아파 쉬어버린 날엔 지구가 나보다 한 바퀴 더 굴러가 있는 것 같아 ‘내일은 더 열심히 해서 두 바퀴를 굴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떽데구루루루, 떽떼구루루루 두 바퀴를 구르고 오면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제자리였다. 몸과 마음엔 멍도 가득했다. 뭔가 이상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머리 위에 쏟아져 있는 ‘해야 할 일’을 치우다 보면 하루가 이미 지나가 있었다. ‘그래, 내일은 꼭 해야지’ 결심해보지만 내일은 내일의 할 일이 또 쏟아져 있었다. 매일매일 그 일들과 함께 떽떼구루루 구르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고 ‘해야 할 일만’ 힘겹게 처리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마음의 소리를 찾으라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하지만 실패할 거라는 두려움은 더 컸다. 실패한 미래를 떠올리며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무언가를 시도해서 더 나쁜 결과를 얻는 것보단 현 상황을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돌아보면 그런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앵무새죽이기 책 표지. Ⓒ열린책들

그러다 핀치 변호사의 말을 들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전 손해 보는 말은 아니다. 오늘 하루 구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지구는 어차피 제자리로 돌아온다. 지구가 도는 동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내가 열심히 돌아도 제자리, 돌지 않아도 제자리다. 물론 불안하겠지. 하지만 그 불안은 내 몫이다. 굴러도, 안 굴러도 불안한 건 똑같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한 발짝 더 가지 않았을까.’  ‘오늘 내가 한 걸음 뒤쳐진 사이 인류는 위대한 도약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막연한 불안함은 열심히 굴러다니는 날에도 여전했다. 해야 할 일을 걷어내고 숨을 돌릴 새면 불안함은 발끝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있었다.

핀치 변호사가 말한 ‘시도’는 타인을 위한 연대를 뜻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애정과 관심 같은 거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당위에 가깝다. 하지만 그 당위가 지켜지는 사회라면 이 책은 이미 절판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이거 참 곤란한 일이다. 사람들이 앵무새를 죽여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일까? 그건 아닐 거다. 앵무새가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 일상에 치여 살거나, 알면서도 손을 내밀긴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유도 모른 채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떽데구루루 굴러다니고 있는 사람이 내민 손은 잡아봐야 미끄러지기 일쑤다. 미안함이나 안타까움에 성급하게 내밀어 잡은 손, 오히려 부담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잘못하다간 같이 굴러 넘어질지도 모른다. 온 몸에 멍이 든 채 멋쩍은 미소로 ‘그러려던 게 아닌데...’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난 오늘은 파업이다. 잠시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 볼 시간이 필요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급식실에서, 돌봄교실에서, 일상에서 너무 바쁜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손 내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늘 하루는 쉬어가련다. 어차피 하나쯤 쉬어도 지구는 돈다.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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