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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사에 폐비 윤씨와 문효세자의 태실?[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이정표와 안내문을 찾기 힘들어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9.07.10 10:50

[논객닷컴]  작년 예천에 있는 용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들르게 된 용문사는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와 함께 경내에 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어 볼만한 요소가 많았다. 이 가운데 몇 가지를 꼽자면 자운루(慈雲樓)가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회담장으로 사용된 나름의 상징성과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장소로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145호)이 있다. 

용문사 대장전과 뒤쪽 봉우리, 봉우리의 정상에 문효세자의 아기씨 태실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용문사 대장전 목불좌상 및 목각탱 Ⓒ김희태

우선 대장전을 올라가는 계단 옆에 웬 표석이 하나 있는데, 해당 표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고적비다. 즉 용문사 대장전은 예나 지금이나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장전 내부에는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와 대장전목불좌상(보물 제989-1호) 및 목각탱(보물 제989-2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 용문사를 방문했을 때 대장전과 내부에 있는 윤장대, 대장전목불좌상 및 목각탱이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고적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표석이다. Ⓒ김희태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회담장으로 사용된 자운루 Ⓒ김희태

그랬던 용문사를 얼마 전 다시 방문했다. 없는 시간을 만들어 또 다시 다녀왔다. 이유는 바로 용문사에 태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다. 분명 작년에 왔을 때 용문사 경내를 돌아봤지만, 태실에 관한 이정표나 안내문을 보지 못했던 터라 “태실이 어디 있지?”라는 의아함과 혹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금 용문사를 찾게 된 것이다.

■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의 성격을 지닌 용문사

예천 용문사와 관련해 정조가 쓴 <일성록>에 언급이 되는데, 여기에 서호수라는 인물이 정조에게 용문사 승려들이 잡역에 동원되는 것을 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천 용문사는 고려 태조가 창건한 것이고, 우리 조정의 광묘(光廟: 세조를 말한다)께서 특별히 유지를 내려 승도들의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 주어서... <중략> 그런데 그 후로 승도들의 역이 많아져서 대부분 흩어져 천 년에 가까운 고적이 장차 지탱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 이미 애석합니다. 게다가 이번에 태실을 봉안한 뒤 수호하는 일을 전적으로 승도들에게 맡기고 있으니... <중략>”

<일성록> 정조 7년(1783) 9월 15일

위의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용문사가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의 지위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에서 나오는 태실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인 문효세자 태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때 호불군주를 자처했던 세조에 의해 승려들의 잡역이 면제되기도 했지만, 정조 때가 되면 서호수의 언급대로 승려들에 대한 역이 많아져 천년 고적인 용문사를 지탱할 수 없고, 이로 인해 태실을 수호하는 것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장전 뒤쪽 봉우리 정상에 자리한 문효세자의 아기씨 태실비 Ⓒ김희태

기록에 언급된 문효세자의 태실, 정확히는 문효세자의 태실지. 용문사 대장전을 기준으로 뒤쪽 봉우리 정상에 문효세자의 아기씨 태실비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은데, 이곳에 묻혀있던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현재 문효세자의 태실은 서삼릉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양 서삼릉, 비공개 지역인 태실의 전경 Ⓒ김희태
서삼릉으로 옮겨진 문효세자의 태실 Ⓒ김희태

이처럼 사찰이 태실을 수호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용문사에서 멀지 않은 예천 명봉사(鳴鳳寺) 역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이곳에는 문종대왕 태실과 사도세자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김천의 직지사(直指寺)에 정종대왕 태실이, 영천의 은해사(銀海寺)에는 인종대왕 태실이 있는 등 태실과 사찰의 관계가 비교적 끈끈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폐비 윤씨의 태실이 용문사에 있다고?

놀랍게도 예천 용문사에는 폐비 윤씨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폐비 윤씨(?~1482)가 누구인가?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의 어머니이자, 훗날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의 원인이 된 인물로, 우리 역사에 깊이 각인이 된 경우다. 본래 폐비 윤씨는 성종의 후궁이었는데, 성종의 왕비였던 공혜왕후 한씨(1456~1474)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인물이다. 당시 성종의 총애를 받은데다 임신한 것이 왕비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연산군이다. 하지만 폐비 윤씨는 후궁 때와는 달라져 있었고, 투기와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 행동을 하면서 폐출이 되고, 결국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회묘 Ⓒ김희태

훗날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연산군에 의해 정국은 요동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폐비 윤씨에 대한 신원 회복을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을 숙청한 갑자사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숭되고, 기존의 묘에서 능으로 승격되며, 회릉(懷陵)으로 불리게 된다. 회릉은 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묘로 격하되어 이때부터 회묘(懷墓)로 불리게 되는데, 실제 회기동의 옛 이름이 회묘동이었다는 점은 지명에 영향을 남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정표가 없어 한참을 헤맨 끝에 찾을 수 있었던 폐비 윤씨의 태실 Ⓒ김희태

이러한 폐비 윤씨의 태실이 용문사에 자리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태실가봉(胎室加封)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보통의 경우 태실가봉은 왕자 혹은 세자가 왕위에 오른 뒤 기존의 태실에 추가로 태실가봉비와 태항아리를 봉안하는 장태석물을 추가로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왕비의 태실이 확인된 사례는 ▶ 강원도 홍천군 동면(=수타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희왕후 윤씨 태실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초암사)의 소헌왕후 심씨 태실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용문사)의 폐비 윤씨 태실이다.

 측면에서 바라본 태실가봉비, 현재까지 확인된 왕비 태실 3곳 가운데 하나로, 왕의 태실에서나 볼법한 태실가봉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희태

현재 폐비 윤씨의 태실은 태실가봉비만 세워져 있을 뿐, 장태석물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폐비 윤씨 태실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폐비 윤씨의 태실은 서삼릉으로 옮겨지게 된다. 한편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태항아리와 지석의 경우 각각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폐비 윤씨의 태실가봉비의 경우 글자 부분에 인위적인 훼손이 가해져 알아보기 어렵지만, 앞면은 왕비태실(王妃胎室)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뒷면의 경우 앞선 지석을 통해 성화십사년십일월십이일(成化十四年十一二月十二日)이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성화 14년은 성종 때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폐비 윤씨의 태실이 경상도 예천(醴泉)에 있음을 적고 있어, 해당 태실이 폐비 윤씨의 태실인 것이 명확한 것이다.

태실가봉비의 뒷면, 인위적인 훼손으로 인해 글자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당대에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희태 

폐비 윤씨 태실의 정확한 위치는 용문사 대장전을 기준으로 동남쪽으로 300~400m 지점의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는 방법은 용문사 해우소 뒤쪽의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200m 가량 더 가면 사진 속의 폐비 윤씨 태실을 만나게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예천 명봉사와 달리 용문사에서 태실과 관련한 이정표나 안내문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태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방문했음에도 현장에서 관련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기에 초행길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날 용문사 인근을 헤맨 끝에 폐비 윤씨의 태실을 마주한 순간 찾았다는 기쁨과 동시에 이정표만 있다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허탈했다. 게다가 문효세자 태실(경상북도 기념물 제173호)이나 폐비 윤씨 태실(경상북도 기념물 제174호) 모두 지정 문화재이기에 관련 안내가 전혀 없다는 점은 분명 개선이 필요한 지점이다. 혹여 예천 용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용문사와 함께 두 태실 역시 함께 관심을 갖고 찾아보기를 권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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