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세상구경]

[논객칼럼=허영섭] 언론계 대선배인 장준봉 전 경향신문 사장이 8일 별세했다. 중일전쟁 무렵인 1937년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니, 향년 82세다.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뒤에도 신문공정경쟁위원장, 뉴스통신진흥회 이사를 지내며 언론계 활동에 기여했다. 이후 (사)국학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으며 타계하기까지도 상임고문을 맡아 왔다. 한마디로, 평생을 부지런히 지내다 가신 분이다. 그러면서도 늘 웃음의 여유를 보여주셨던 주인공이다. 근년에 직접 뵐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고인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기만 하다.

그러나 여기서 고인을 얘기하려는 것은 좀 다른 의미에서다. 어쩌면 고인으로서는 생전에 매우 불쾌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그가 2000년 당시 경향신문 사장으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공개적인 반발에 부딪쳤던 사실을 되살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신문사 안팎에서 추천된 30여 명의 후보자 가운데 최종 낙점을 받아 마지막 절차인 주주총회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이의 제기의 당사자가 바로 필자였다. 당시 신참내기 논설위원이라는 내 위치에 관계없이 당돌하다고 비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픽사베이

그때 고인이 경영진추천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유리한 평가를 받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첫째는 전문경영인 경력을 갖췄다는 것이고, 둘째는 경향신문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신문사 경영이 어려움에 처해 있던 터라 가급적 전문경영인 출신을 선호하고 있었던 데다 수습 선배였기에 그만큼 애사심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한화그룹이 경향신문 경영에서 손을 뗀 직후였기에 신문사의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그로서는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주주총회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마이크를 잡고는 “잠시 뒤면 사장으로 취임하실 분이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심정으로 몇 말씀 드리겠다”며 운을 떼었다. “만장일치의 의미에서 박수로 통과시켜 달라”는 사회자의 주문에 잠깐의 여유를 두고 거수로 발언권을 얻은 터였다. 그렇다고 그의 선임 자체를 무산시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미뤄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단지 신문사 구성원들 사이에 그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인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장점으로 꼽힌 앞서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 조목조목 문제점을 제기했다. 그가 외환은행 이사직을 포함해 경영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무부 대변인을 지낸 다음 낙하산으로 임명된 자리였기에 전문경영인으로 간주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점을 들었다. 경향신문 출신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내 생각은 달랐다. 그가 신문사를 떠난 뒤 후배들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은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으므로 ‘수습 출신’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2000년 6월 15일, 지금은 없어진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경향신문 주주총회의 한 장면이다.

이처럼 20년 가까이 지난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우리 언론사들이 내부의 반대 의견들을 긍정적 차원에서 용인하고 있는지 묻고자 하는 데 있다. 기자에게는 대통령에게도 마이크를 들이대고 “독재정치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야 하는 책무가 부여되어 있다. 아무리 언론 경영이 상업화되는 추세에 있다고 하지만 유력 광고주인 재벌 총수에게도 잘못을 따지고 들어야 하는 게 기자로서의 숙명이다. 그런데도 기자가 외부 취재를 마치고 소속 언론사 편집국이나 보도국에 들어설 때부터 상황은 급변하기 마련이다.

경영진이나 편집국 차원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해서 한직으로 밀려나는 등 불리한 인사의 결과가 소문으로 자주 나돌고 있다. 미운털이 박힌 탓일 것이다. 심지어 지방으로 좌천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지난 정권 당시의 보도 책임자들이 적폐로 몰려 줄줄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취재 현장에서는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면서도 막상 소속사의 위계질서에 들어서면 윗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해준다. 다른 어느 조직보다 다양한 의견이 소통돼야 하는 언론사에서 자기 검열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쑥스럽기만 하다.

내가 주주총회에서 장 전 사장의 선임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고인께선 오히려 웃으면서 나를 상대해 주셨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리셉션 장소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옆 사람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고인이 경향신문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나 임기가 끝난 뒤에도 비슷했다. 가끔씩 농담조로 나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주총장에서 벌어졌던 일말의 사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나도 경향신문을 떠난 뒤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어느 언론인 모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그가 애호하던 ‘족욕 요법’에 대해 일장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뜨거운 물에 발목 부분을 잠기게 한 상태에서 온몸에 땀을 내도록 하는 건강 유지법이다. 언론계에선 한때 족욕 요법이 고인의 대명사처럼 불린 적이 있을 정도다. 서너 해 전인가는 고인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발끝치기 운동’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양쪽 발끝을 많이 부딪칠수록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나빠졌던 시력을 회복했다고도 했다. 무엇이든지 한 번 몰입하면 이처럼 끝을 보는 성미였다.

그래도 신문사 내부에서만큼은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에도 너그러웠다. 적어도 언론사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용인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때문일 것이다. 언론계 상황이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요즘 그의 타계 소식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고인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허영섭

  뿌리깊은나무 기자 

  전경련 근무

  현 이데일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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