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논객칼럼=이동순] 우는 소리가 마치 피를 토하듯 처절한 느낌으로 들린다고 해서 자규(子規)란 이름으로 불리던 새가 있었지요. 자규는 두견새, 접동새란 이름으로도 불리던 소쩍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옛 선비들은 멸망한 왕조의 슬픔을 이렇게 새 울음소리에 견주어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근대 가수들 가운데서 두견새의 흐느낌처럼 거의 절규와 통곡에 가까운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험난했던 시기인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온몸으로 역사의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 고난의 시기를 피눈물로 절규했던 가수 남인수(南仁樹, 1918~1962)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산유화(山有花)'란 노래의 한 소절을 기억하시는지요?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님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마는 님은 어이 못 오시는가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지네
꽃은 지면 피련마는 내 마음은 언제 피나
가는 봄이 무심하냐 지는 꽃이 무심하려뇨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산유화' 전문

이 노래의 창법은 거의 통곡과 절규처럼 들립니다. 김소월의 시작품 '산유화'를 연상케 하는 이 가요작품은 어떤 우여곡절로 인하여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비명에 세상을 떠난 모든 생령들을 흐느낌으로 위로하고 애틋했던 존재를 더듬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식민지와 분단으로 인하여 사연도 곡절도 많았던 우리 근대사에는 그러한 중음신(中陰身)들이 참으로 많았겠지요.

언제였던가, 다정한 벗과 더불어 어느 해 늦가을 지리산 세석평전에 올라 어둑한 저녁에 텐트를 쳐놓고 앉아서 반합 뚜껑에 소주를 부어 서로 권하며 이 노래를 밤새도록 부르고 또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험난했던 역사의 언저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념의 포로가 되어 지리산 골짜기로 내몰렸던 가엾은 청년들의 짧았던 생애를 더듬으며 그날 밤 우리는 이 노래를 절규로 불러서 그들에게 헌정했던 것입니다.

청년 시절의 가요황제 남인수 Ⓒ이동순

가수 남인수는 40여년 가까운 생애를 통하여 무려 1천곡 가량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많고 많은 노래 중에서 공연 중 앙코르를 요청받을 때 반드시 이 '산유화'로 팬들에게 보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노래는 남인수 자신이 정작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었던가 봅니다. 낡은 유성기 음반으로 들어보는 '산유화'는 그것이 단지 한 편의 대중가요가 아니라 매우 격조 높은 성악곡을 듣는 듯 놀라운 예술성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무렵, 실제로 남인수는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1917~1983)에게 찾아가 가곡의 창법과 발성지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팬들에 의해 ‘가요황제’로 추앙되고 그 전설적 명성이 높이 일컬어졌던 가수 남인수는 원래 진주가 아니라 경남 하동에서 출생했습니다. 첫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부친 사망 후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의 강씨 문중으로 들어가 호적 명이 강문수(姜文秀)로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가수로 데뷔한 뒤에 작사가 강사랑이 새로 붙여준 예명 남인수를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경남 하동 출신 작사가 정두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남인수의 모친 장하방 여사가 의령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주막집을 운영했었는데, 이때 주막의 단골손님이던 최씨와 강씨 두 사람과 매우 가까웠다고 합니다. 남인수의 출생배경도 이런 복잡한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하네요. 소리를 유난히 잘 하던 어머니의 예술적 끼가 아들 강문수의 삶에 그대로 무르녹아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강문수는 너무나 소설적이고도 수수께끼 같은 유소년기를 보낸 듯합니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인민배우였던 최삼숙이 자신의 부친 최창도와 최창수(남인수)가 형제간이었다고 증언했으니 남인수는 최삼숙의 삼촌입니다.(최창호,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 평양출판사, 2003) 어린 시절 강문수는 어려운 환경을 벗어나보려는 마음으로 무작정 일본 사이타마(埼玉)현으로 건너가 전구공장(혹은 제철공장)에 소년 노동자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 일본의 동해상업학교를 다녔다는 설도 있지요. 당시 일본의 생산 공장들의 작업 현실은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가혹하고 힘겨운 악조건이었는데, 강문수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노동자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천재가수 남인수 Ⓒ이동순

10대 후반에는 어느 제철공장 노동자로 취업하여 한동안 쇠를 다루는 일을 하는데 쇳물을 다루는 중노동 중에서도 강문수는 타고난 예인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학력도 없었고, 음악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으나 천성의 미성에다 노래에 대한 센스가 뛰어났지요. 그리하여 일본 가수들의 엔카를 솜씨 있게 따라 불러서 주변 노동자들로부터 진작 가수 칭호를 들었습니다.

이런 배경의 얼개를 통해서 보더라도 경남 진주는 가수 남인수의 제2의 고향이자 성장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이미 대중예술가 김영환(김서정), 손목인, 이재호, 이봉조 등을 비롯하여 예능 방면에서 활동하는 다수의 명인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합니다. 남인수, 즉 강문수가 본격가수로 데뷔하게 된 것은 시에론레코드 사무실이었고,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이던 문예부장 박영호(처녀림)와의 운명적 만남 직후였습니다. 1936년, 강문수는 18세의 나이로 '눈물의 해협'(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을 최초곡으로 취입하게 됩니다.

현해탄 초록 물에 밤이 나리면
님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래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짙어 가는 밤

님 찾아 고향 찾아 흐른 이십년
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
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
물 우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

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
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
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면
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눈물의 해협' 전문

비극적 한일관계와 한반도의 슬픔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노래였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별반 탐탁하지 못했습니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시에론을 떠나 이철 사장이 운영하던 오케레코드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동일한 노래의 악보 '눈물의 해협'에서 가사만 바꾼 '애수의 소야곡'(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을 발표했습니다. 흰 플란넬 양복에 검정색 나비넥타이를 맨 박시춘이 직접 기타를 치고, 그 매력적 반주에 맞춰 남인수가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는 광경은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크게 설레게 하고 사뭇 격동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무대에 열광하여 기타를 배우겠다는 청년들이 수없이 박시춘을 찾아왔으나 자기에게는 선생도 제자도 없다며 모두 물리쳤습니다.

'눈물의해협' 가사지 Ⓒ이동순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마는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애수의 소야곡' 전문

'애수의 소야곡'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남인수는 곧장 최고 가수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른바 공전(空轉)의 대히트였지요. 음반은 줄곧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유성기를 내다 놓은 채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넘기는 남인수의 기막힌 그 노래를 날마다 연속으로 틀고 또 틀었습니다. 이미 매진된 이 레코드를 구하기 위해 레코드 회사 앞 여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레코드 상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언론들은 남인수에 대해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이라고 연일 보도하며 가수 남인수의 출현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음반을 주문하려는 전국의 레코드 소매상들이 서울로 구름같이 몰려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남인수의 LP음반 Ⓒ이동순

식민지조선 최고의 인기곡 ‘애수의 소야곡’은 일본 데이치쿠레코드사에서 일본어로도 취입이 되었는데. 남인수는 이 노래를 당시 일본의 여가수 도도로키 유키꼬(轟夕起子)와 함께 듀엣으로 불러 크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노래의 일본 버전 제목은 「애수의 세레나데」였습니다. 박시춘과 남인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바로 한국가요사의 흐름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절묘한 명콤비의 실력을 과시한 두 사람은 ‘조선의 고가(마사오), 후지야마(이치로)’ 콤비‘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널리 선전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발표한 남인수의 대표곡이 얼마나 많은지 그 정황과 경과를 알고 나면 아마 독자 여러분께서는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범벅 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서귀포 칠십 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거라 삼팔선', '고향은 내 사랑', '고향의 그림자', '기다리겠어요',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남매', '남아일생', '눈 오는 네온가',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무너진 사랑탑', '무정열차', '물방아 사랑', '어린 결심', '어머님 안심하소서', '울리는 경부선', '인생선', '청년고향', '청노새 탄식', '청춘고백', '추억의 소야곡' 등등. 우선 사례를 떠올려 보더라도 이렇게 스무 곡을 당장에 넘길 만큼 주옥같은 노래들이 있지요. 하나같이 아름다운 절창으로 여러분의 흘러간 시절, 가슴 속에 한과 눈물과 사연도 많았던 그 시절의 추억들이 마치 흑백사진의 실루엣처럼 어렴풋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무대에서 열창하는 남인수 Ⓒ이동순

이 가운데 ‘범벅서울’은 ‘애수의 소야곡’ 이후 첫 취입곡으로 1930년대 서울 장안의 대중적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네온싸인, 룸바, 탱고, 재즈, 왈츠, 인조견, 랑데부 등 온통 서구 외래문화의 범람 속에서 당시 청춘 남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인가수 고복수가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었는데 남인수의 혜성과 같은 등장으로 고복수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퇴조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1938년은 오로지 가요황제 남인수의 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아일보 1938년 4월21일자 기사에는 ‘금년 22세, 오케에 입사한지 3년. ’범벅 서울‘이 처녀작이며 ’물방아 사랑‘으로 단연 유행가요계의 기린아가 된 일세의 행운아로서 바야흐로 도원경에 잠겨 있습니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화류계 여성의 덧없는 운명을 노래한 ‘꼬집힌 풋사랑’(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을 히트시키며 불행한 처지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이 레코드는 ‘애수의 소야곡’ 판매량을 훨씬 능가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 때문에 서울 청진동 어느 기생이 음독자살을 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기도 헀습니다. 그녀의 머리맡 축음기 위에는 ‘꼬집힌 풋사랑’ 음반이 얹혀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애수의 소야곡’, ‘꼬집힌 풋사랑’ 두 곡은 오케레코드 최고의 인기곡으로 선전되었고, 남인수는 이난영과 더불어 가요계의 정상에 우뚝 올라앉았습니다. 작곡가 박시춘과 가수 남인수의 절묘한 콤비 활동은 오케레코드사의 자랑이자 자존심이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태평레코드사에서는 이재호, 백년설 콤비를 내세워 두 레코드사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꼬집힌풋사랑' SP음반 Ⓒ이동순

1940년은 일제의 발악이 극단으로 치달아가던 해였습니다. 이 시기에 남인수는 기막힌 노래 하나를 발표하게 됩니다. 바로 ‘울며 헤진 부산항’(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이란 걸작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이 노래에 흠뻑 취했었지만 특히 정신대에 끌려가던 여성들, 징용과 지원병으로 고향을 떠나가던 청년들이 부산항을 떠나가는 뱃전에서 멀어지는 고국 땅을 바라보다가 기어이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흐느끼며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남인수 성음의 특징과 창법의 장점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노래로 가수 자신이 무대에서 앙콜 요청을 받게 되면 반드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해 가을로 접어들면서 오케레코드사에서는 최고가수 남인수에 대한 환대의 하나로 ‘남인수 걸작집’이란 이름의 음반을 제작 발매합니다. 일본 닛카츠(日活)의 스타인 여성가수 도도로키 유키코가 일본어로 대사를 맡았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억압과 단속이 가중되는 시대현실 속에서도 남인수는 '진주의 달밤'(1940), '눈 오는 부두'(1940), '불어라 쌍고동'(1940), '눈 오는 네온가'(1940), '분바른 청조'(1940) 등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도 그 인기 때문에 기어이 조선총독부의 동원에 휘말려들게 되었습니다. 1941년 11월, 조선청년을 전선으로 끌어가기 위한 영화 ‘그대와 나’가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가네꼬(金子英助)란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지원병훈련소의 조선청년과 아사노(淺野美津技)란 일본 처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른바 내선(內鮮) 통혼풍조를 은근히 조장하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조선청년의 고향을 보고싶어 하는 일본처녀의 소원을 들어 둘은 함께 청년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처녀는 일본 왕을 위해 전선에 나가는 청년을 격려한다는 줄거리로서 일본의 조선군보도부가 제작한 국책영화라 하겠습니다. 감독은 히나쓰란 이름의 조선청년 허영이었지요. 출연자는 고스기, 오니찌, 미야께, 마루야마, 가와즈, 아사기리, 그리고 리꼬랑(이향란), 김소영, 문예봉, 성악가 나가다 겐지로 등입니다. 바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르는 가수로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오케의 남인수, 장세정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1943년은 가요황제 남인수에게 최악의 한 해였습니다. ‘혈서지원’, ‘이천오백만 감격’ 따위와 같은 소름끼치는 군국가요를 부르게 되는 일에 강제동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해에 발표한 절창 ‘서귀포 칠십 리’가 있어서 가슴 속의 답답함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작사가 조명암은 분단 이후 북한에서 발표한 회고록에서 이 노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서귀포 칠십 리’는 나라를 잃은 식민지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그리운 심정, 빼앗긴 나라도, 헤어진 부모형제도, 사랑도, 그리움에 목 메이는 심정을 서귀포의 자연과 바다가 아가씨에 의탁하여 노래한 가요이다.
-‘계몽기가요선곡집’(황룡욱 편), 평양 문화예술종합출판사, 2001, 267쪽

1950년대 초반 모슬포 육군군예대 시절의 군복을 입은 대중연예인들(앞줄 왼쪽 남인수, 왼쪽 두 번째 금사향, 뒷줄 중앙 구봉서) Ⓒ이동순

일제말 오케레코드사에서는 '오케그랜드쇼'(일명 '조선악극단')를 구성해서 남만주, 중국 일대를 누비며 순회공연을 헀습니다. 오케 계열의 신생 악단 단장 격으로 장세정, 고운봉과 만담의 손일평, 지일련 부부, ‘조선의 바스터 키튼’으로 불려졌던 이방 등을 주축으로 공연을 했는데, 남인수는 항상 무대의 중심으로 자리를 확고히 지켰습니다.

이 오케그랜드쇼가 평양의 긴찌오자(金千代座)에 출연했을 때 무대 뒤로 조선인 형사가 찾아와 박시춘 남인수 두 사람을 체포해갔습니다. 경찰서에서 형사가 주임에게 보고하자 주임은 “이 조센징 거지새끼야! 네놈들이 기타를 치며 부른 노래를 여기서 한 번 더 해봐!” 라고 호통쳤습니다. 이때 남인수가 어쩔 수 없이 굴욕을 참고 불렀던 노래는 바로 ‘인생출발’(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이었습니다.

가사의 일본어 번역을 종이에 쓰고 난 주임은 “운명의 쇠사슬이 대체 무슨 뜻이냐? 무엇을 울면서 보냈다는 거냐? 바른대로 말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운명의 쇠사슬이라고? 일본제국주의에 묶여 꼼짝할 수 없다는 뜻인가? 천황폐하를 받드는 네놈들이 황공하게도 불순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이냐? 네 놈들의 사상을 철저히 조사해 보아야겠다”라고 고함을 지르며 주임은 두 사람을 하룻밤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그 무렵 남인수는 오케그랜드쇼 무대에서 노래뿐만 아니라 가수 이화자와 함께 이도령 역을 맡아 뮤지컬 ‘대춘향전’(이서구 작)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유치장에서 풀려난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공연시간에 당도할 수 있었지요. 막이 오르고 이도령 역의 남인수가 첫 대목에서 방자역의 이종철과 함께 멀리 그네를 타고 노는 춘향 역의 이화자를 보고 막 대사를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남인수의 입에서 갑자기 피가 솟구쳐 나와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지병인 폐결핵이 차디찬 유치장 구금으로 악화되어 결국 각혈로 이어졌고, 남인수는 무대에서 부축을 받아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회복되면서 남인수는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지쳐서 또 병이 도지면 약을 마셔가면서 그 자리를 버티어나갔다고 합니다. 눈물겨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45년 드디어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풀려난 뒤 남인수는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희망 삼천리’란 새로운 가요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후 작곡가 박시춘과 함께 '제7천국', '은방울 쇼' 등을 조직해서 운영하기도 하고, 직접 아세아레코드사라는 음반사를 설립해서 운영하기도 합니다. 가수와 흥행사의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동분서주하다보니 과로 때문에 지병인 결핵은 더욱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남인수는 1947년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등을 발표하면서 점차 분열로 치달아가는 민족의 아픔을 비판하고 동질성을 절절히 호소했습니다.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이 노래들의 특징은 대중들에게 크게 부각이 되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인수는 국방부 해군 정훈국의 제2소대장이 된 작곡가 박시춘을 따라 선전과 직속 문예 중대 제2소대 소속 문관으로 종군했습니다. 당시 이 부대조직에서 현인, 강준희, 신카나리아, 심연옥, 송민도, 금사향, 영화배우 장동휘, 발레리나 최미선 등의 대중연예인들과 함께 일선장병 위문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1953년 가요황제 남인수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최대의 히트곡 하나를 발표하게 됩니다. 바로 ‘이별의 부산정거장’입니다. 이 노래 가사와 창법에는 오랜 전쟁 속에서 겪었던 피난살이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 환도(還都)와 환고향(還故鄕), 이별의 희비가 교차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있습니다. 전쟁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 노래는 음반 판매고 10만여 장을 훌쩍 넘기는 대기록을 세우며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여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 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 주소서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문

남인수의 절창 ‘이별의부산정거장’ SP음반(왼쪽)과 LP음반 Ⓒ이동순

당시에는 대중가요에 대한 서양음악 전공자들의 편견과 멸시가 짙게 깔려있을 때입니다. 이 시절에 남인수는 앞서 말한 ‘산유화’를 발표합니다. 그야말로 격조 높은 대중가요로서 크게 히트를 했는데 유행가를 저속하게 보는 지식층을 의식한 작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 어디 한번 보아라. 이래도 우리 대중가요를 천시하겠다는 거냐’라고 기염을 토한 회심의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1957년 무렵의 남인수를 증언하는 가요팬들은 당시 가요황제가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의 여러 극장을 바쁘게 다니는 광경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전성기의 겹치기 출연에서 시간을 절약하느라 자전거를 타고 극장을 이동해 다니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1950년대 말, 남인수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져서 무대에 제대로 오르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남인수 노래의 모창가수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남강수, 김광남, 고대원 등이 가요황제 대역으로 무대에 올라 인기를 유지시켜 갑니다. 뿐만 아니라 옛 오케레코드사 동료가수였던 이난영과의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고복수의 은퇴기념공연으로 전국을 순회한 직후 두 사람의 감정은 연애관계로 발전하여 동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핵환자 남인수에 대한 이난영의 헌신적 간호는 참으로 각별했다고 합니다.

동거 시절의 남인수,이난영 Ⓒ이동순

민족의 수난시대를 살아오면서 울분으로 응어리진 문화예술인들 사이에 폐결핵은 유행처럼 만연되었습니다. 이 고질적 질병을 시대와 역사의 짐인 양 온몸으로 안은 채 버티어 오다 남인수는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까지 병약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올랐을 정도로 가수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독재정권의 총탄에 쓰러져간 어린 학생을 추모하는 노래 ‘사월의 깃발’을 취입합니다. 1961년 그의 몸은 이미 모든 기력이 소진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가요황제 남인수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특별히 제작한 병실 침대 마이크 앞에 앉았습니다. 노래 ‘무너진 사랑탑’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몹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취입한 이 곡은 가요황제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작곡가 오민우는 그날의 처절한 최후 녹음장면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작고하시기 직전 모 레코드사의 장충 스튜디오 유리창 너머로 뵙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백지장같이 하얀 얼굴로 연신 각혈을 하셨지요.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었지만 레코드회사에서는 선생님의 명이 다한 줄 알고 오히려 강행을 시켰어요. 어쨌든 의자에 앉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취입한 ‘무너진 사랑탑’은 마지막 불꽃으로 타올라 크게 히트를 했지요. 그야말로 선생님의 생명과 바꾼 노래였습니다"

'무너진사랑탑'LP음반 Ⓒ이동순

세상을 떠나기 불과 석 달 전까지도 무대에 섰으며, 병으로 고통 받을 때 앉아서 취입을 하면서도 오히려 더욱 깊이 있는 창법으로 열창해서 주변사람들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가요황제 남인수의 진정한 프로정신은 후배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를 오랜 세월 흔들림 없는 당대 최정상의 가수로 흠모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드디어 1962년 6월26일 오후 2시, 서울 충무로 자택에서 위대한 가수 남인수는 향년 44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6월30일, 가요계 최초로 연예인협회장이 엄수되었습니다. 충무로 상가(喪家)에서부터 조계사 앞은 물론, 홍제동 고개 너머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날 장례식장에는 팔도에서 운집한 추모인파가 종로통을 가득 메워서 마치 국민장을 방불케 했다고 합니다. 남인수의 출세작인 ‘애수의 소야곡’이 장송곡 대신 은은히 연주되었는데, 이 구슬픈 선율이 참석자의 슬픔을 더욱 고조시켰으며, 소복한 여인들의 흐느낌은 저녁이 될 때까지 흩어지지 않았다 하네요.

경남 진주시 하촌동 뒷산에 있는 가요황제 남인수 무덤 Ⓒ이동순

수년 전 제가 이끌고 있는 전국적 규모의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회장 이동순)'에서는 도합 12장의 CD로 제작한 가요황제 남인수의 전집을 발간해서 장안의 놀라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270곡이 넘는 남인수의 지금까지 확인된 모든 노래들이 전집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조용한 시간, 한 곡 한 곡 들을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는 애잔함이 사무칩니다.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가 발간한 'CD남인수전집' Ⓒ이동순

그는 가요뿐만 아니라 음악의 전 영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잡음이 배제된 단일한 대역(帶域)에서 순수한 소리를 뿜어내는 그의 미성은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자유를 맘껏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자신감으로 충만한 여유와 생에 대한 진정으로 몸을 떨게 되는데, 아마도 3옥타브를 넘나드는 음역에서 뿜어내는 자유로운 성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성음과 관련하여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정통 성악가들도 그와 함께 무대에 서길 꺼려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고음에서는 쇳소리가 울리듯 쟁쟁하고 날카롭게 듣는 이의 폐부를 파고 드는가 하면, 저음에서는 속삭이듯 흐느끼듯 하면서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을 안겨주는 매혹적인 미성(美聲), 폭발적이고 정열적이며 순발력이 뛰어난 창법, 무려 세 옥타브까지 거침없이 넘나드는 자유자재한 발성 능력, 정확한 가사 전달력(발음) 등은 거의 완벽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절망과 실의에 빠졌거나 현실생활에 지친 민중에게 활력을 실어 주는 마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제강점기부터 그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요황제 남인수의 노래가 우리 가슴에 가장 절절하게 사무치도록 다가오는 시간은 우리네 삶이 어딘가에 시달려 심신이 몹시 피로하거나 곤비한 시간입니다. 아니면 고달픈 나그네 길에서 돌아오는 경우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러한 저녁 시간, 버스나 기차의 붐비는 공간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바로 그때 성능이 시원치 않은 스피커에서 뿌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뒤섞여 들려오는 정겹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것은 틀림없이 남인수의 노래이지요.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남인수의 노래는 대개 유랑과 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과거의 회상, 인생의 애달픔 따위를 담고 있습니다.

민족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노래 한 가지로 민족의 고통을 쓰다듬고 위로해 주었던 가수 남인수! 그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나 우울하고 암담한 시간의 저 밑바닥 심연에 가라앉아서도 결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다부지고 결연한 목소리.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카랑카랑하지만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 바로 그것이 남인수 성음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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