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23]

[논객칼럼=김부복] 맥도널드 햄버거는 ‘미국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 사람 가운데 96%가 ‘맥도널드’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햄버거 소비량이 단 ‘1초’에 200개나 된다는 얘기도 있다. 맥도널드 매장에서 몇 시간 알바를 하면, ‘권총 한 자루’ 값을 쉽게 벌 수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는 ‘총기 사고’가 걸핏하면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햄버거의 ‘원조’는 미국이 아니다. 몽골이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하던 당시 몽골 사람들은 날고기를 소화가 잘 되도록 잘게 다져서 먹었는데, 서양 사람들은 이를 ‘타르타르스테이크’라며 껄끄러워했다. 몽골의 음식까지 무서워했던 것이다.

‘타르타르스테이크’는 몽골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에 전해졌고, 다시 독일로 넘어갔다. 독일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날고기를 익혀 먹으면서 ‘함부르크스테이크’가 되었다. 이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미국으로 이민한 독일 사람들이 퍼뜨리면서 ‘햄버크’로 변했다. 그 ‘햄버크’가 미국 사람 발음으로 ‘햄버거’로 된 것이다.

몽골의 다진 날고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쇠고기 육회’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햄버거는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아서 우리나라에 도착하고 있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서울 압구정동에 ‘맥도날드 1호점’이 생겼던 것이다.

Ⓒ픽사베이

몽골이 ‘원조’인 음식은 더 있다. ‘샤브샤브’다. 언론인 겸 작가로 활동하다가 2017년 별세한 김왕석의 ‘사냥꾼 이야기’에 나오는 얘기다.

홍학봉이라는 유명한 사냥꾼이 만주의 길림성에서 ‘산양’ 10여 마리를 잡아서 평소에 신세 좀 졌던 ‘왕 대인’에게 보냈다.

집에서 기르는 양은 고기에서 노린내가 약간 나고 기름기가 많지만, 산양은 그게 없다. 맛도 연하고 담백하다고 한다. 따라서 산양 요리는 ‘진미’가 아닐 수 없다. 산양의 생피는 산돼지나 노루의 피처럼 ‘보약’으로 마시기도 했다.

그 맛좋고 몸에 좋다는 산양을 10마리 넘게 보냈는데 반응이 없을 수 없었다. 왕 대인이 홍학봉을 식사에 초청했다.

홍학봉은 왕 대인 집에서 두 종류의 ‘양고기 요리’를 포식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샤브샤브’였다.

몽골 사람들은 양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칭기즈칸의 군대에서도 양고기를 자주 제공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산양 고기가 ‘짱’이었다.

하지만 싸움터에서는 요리방법이 거창할 수 없었다. 간소해야 좋았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목욕통처럼 큰 그릇에 펄펄 끓인 물에 엷게 빚은 양고기를 살짝 넣었다가 익을 만하면 먹는 방법이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둘러앉아서 ‘샤브샤브’를 즐긴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철판구이’였다. 철모 모양으로 가운데가 불룩한 철판을 달궈서 그 위에 고기를 굽는 방법이었다.

‘양고기 철판구이’는 원래 소똥이나 말똥 말린 것을 연료로 했지만, 왕 대인은 홍학봉에게 소나무 숯불로 구운 양고기를 내놓았다. 맛이 연료보다는 소스로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왕 대인은 새우기름 또는 개기름, 간장, 중국 샐러리, 마늘, 부추 등으로 만든 소스를 양고기에 발라서 직접 굽고 있었다. 1분 이상 구우면 안 된다며 고기색깔이 변하면 얼른 들어내서 홍학봉에게 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철판구이’로 먹는 게 ‘장교용’, ‘샤브샤브’는 사병용이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즘의 ‘샤브샤브’는 사병용 요리였던 셈이다. 어쨌거나 홍학봉은 그날 장교용과 사병용 요리를 모두 배터지게 먹었다고 했다.

만주를 지배했던 고구려 때는 이 양고기가 당연히 흔했다. 양은 고구려의 중요한 가축 가운데 하나였다. 광개토대왕이 ‘비려’라는 곳을 정복하면서 소와 말, 그리고 양을 ‘무수히’ 사로잡기도 했다. ‘무수히’라고 했으니,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잡았을 것이다. 그 많은 양을 먹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양고기가 ‘귀한 음식’이 되고 있었다. 임금도 먹기 힘들었다.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 13년(1431), 임금이 심한 ‘갈증(渴症)’으로 시달리자, 신하들이 건의했다.

“마땅히 먼저 식물(食物)로 다스려야 할 것인데, 흰 장닭(白雄鷄)과 누른 암꿩(黃雌雉), 그리고 양고기(羊肉)가 능히 갈증(渴症)을 지식시킨다고 하오니, 닭은 인순부(仁順府) 등에서 날마다 돌아가며 바치게 하고, 꿩은 응패(鷹牌)로 하여금 날마다 사냥해 바치게 하고, 양은 5∼6일마다 한 마리를 바치게 하소서.”

하지만 ‘어진 임금’ 세종대왕은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양고기의 경우는 나라에서 생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싫다며 사양하고 있었다.

“닭은 이어댈 수 없고, 꿩은 바치는 자가 있지만, 양은 본국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니 더욱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중종 20년(1525)에는 이 ‘세종대왕의 과거사’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시강관 정응린(鄭應麟)이 임금에게 강연했다.

“세종께서 항시 갈증으로 고생하시자, 흰 수탉과 누런 암 양고기로 치료하기 청했었는데, ‘내가 어찌 자봉(自奉)하기 위해 생물의 목숨을 해치겠는가? 더구나 양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시며 마침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서경에 ‘다스린 임금과 도가 같으면 흥하지 않을 수 없고 어지럽힌 임금과 같은 짓을 하면 망하지 않을 수 없다’ 했으니,… 더욱 살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산양은 반달가슴곰, 수달과 함께 ‘멸종위기 1급 야생생물’이 되었다. ‘생태통로’를 지나가는 산양을 ‘관찰’이나 할 정도다. ‘양꼬치’는 어쩌다가 구경하는 ‘귀한 음식’이 되었다. 홍학봉이 한꺼번에 산양을 10여 마리나 잡았던 만주 땅이 ‘남의 땅’이기 때문이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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