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북방계 습지식물의 피난처’ 용늪의 마스코트

용담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Gentiana jamesii Hemsl.

[논객칼럼=김인철] 태풍 다나스의 한반도 상륙 하루 전인 지난 7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서흥리 대암산 용늪 자연생태학교 주차장. 낮 기온이 34도까지 오르고, 다가오는 태풍의 영향으로 오후부터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오전 8시 반까지 만나자’는 약속대로 어김없이 다섯 명의 ‘꽃쟁이’들이 모였습니다. 한 달여 전 예약을 하고, 다른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야생화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니 치솟는 수은주니 태풍 전야의 악천후쯤은 아랑곳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곳에서 주민 안내원을 만나 탐방안내소까지 다시 차량으로 이동한 뒤,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 시각은 오전 9시.

산길에 접어든 지 2~3분쯤 지났을까. “구실바위취 꽃이 아직 풍성하고 싱싱합니다.” 몇 걸음 앞선 이가 길섶의 꽃소식을 전합니다. 한 야생화 동호인 사이트 회원들로 저마다 매주 한두 차례 이상씩 전국으로 꽃 탐사에 나서는 이들과의 동행이기에 참으로 많은 야생화를 만날 것이란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 꽃의 대명사인 하늘말나리와 말나리를 비롯해 왕엉겅퀴, 숙은노루오줌, 노루오줌, 토현삼, 참나래박쥐나물, 산짚신나물, 터리풀, 단풍터리풀, 동자꽃, 눈빛승마, 큰산꼬리풀, 두메고들빼기, 물양지꽃, 단풍취, 참좁쌀풀, 꽃창포, 술패랭이, 그리고 꿩의다리아재비의 덜 익은 풀빛 열매와 딱총나무의 붉은 열매 등이 ‘매의 눈’에 포착됩니다. 심지어 이런저런 이파리에 가려진 나뭇가지를 타고 오른 덩굴줄기에 달린, 아직은 피지 않은 숱한 만삼 꽃봉오리 중에서 겨우 입을 벌린 단 한 송이를 찾아냅니다.

지난 7월 19일 강원도 대암산 용늪에서 만난 북방계 고산식물인 비로용담. 비로용담의 남한 내 유일한 자생지인 용늪이 북방계 희귀식물의 피난처임을 실감케 한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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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시작 2시간 만인 오전 11시. 드디어 천연기념물이자, 생태경관보전지역, 습지보호지역으로 1997년 국내 제1호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용늪에 도착합니다. 대암산(해발 1,304m) 정상 바로 밑 해발 1,280m에 위치한 용늪은 큰용늪(30,820㎡)과 작은용늪(11,500㎡)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연중 5개월 이상이 영하의 기온이고, 170일 이상 안개가 끼는 춥고 습한 날씨가 만들어낸 고층습원(高層濕原). 특유의 자연적 환경으로 남한 내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희귀 식물이 자생하는 보고. 현재 작은용늪은 복원 공사로 인해 아예 출입이 안 되고, 큰용늪만 사전 예약을 받아 최대 하루 250명까지 방문이 가능합니다.

2017년 7월 9일 백두산 수목한계선 위 고산 평원에서 만난 비로용담. 용늪에서는 습지 무성한 사초 더미 속에서 피는 데 반해, 좀참꽃과 들쭉나무 등 키 작은 고산식물 사이에서 핀다. 백두산과 대암산에 핀 비로용담은 남과 북이 하나의 식물공동체임을 말해준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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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에 동행한 주민 안내원의 바통을 이어 안내를 맡은 현지 해설사와 함께 조심스레 나무 통로를 따라 큰용늪에 들어서자, 축구장 3개 크기의 넓은 초지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꽃은 뭉게구름처럼 하얗게 핀 꿩의다리. 물론 국내 다른 산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탁 트인 고산 초원에 풍성하게 핀 꿩의다리는 백두산 해발 1,400m 지점인 왕지(王池) 초원에 핀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천천히 습지 안으로 들어서자 20~30m쯤 떨어진, 제법 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 안에 자잘한 꽃이 여럿 보입니다. 망원렌즈로 당겨보니 큰방울새란입니다. 그 곁에 흰색 꽃줄기가 여럿 곧추서 있습니다. 흰제비란입니다.

7월 19일 큰용늪 습지에 핀 흰제비란과 큰방울새란.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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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드디어 찾았습니다.” 갑자기, 그러나 조만간 터져 나오리라 예상했던 환호성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꽃에 절대 손대지 마세요. 꽃봉오리가 그냥 닫힐 수 있습니다.”라는 또 다른 이의 경고가 이어집니다.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삼복더위, 폭풍전야의 날씨를 무릅쓴 이 산행의 목표인 비로용담을 만난 것입니다. 대암사초와 산사초, 삿갓사초 등 여러 종의 사초과 식물들이 잔디처럼 촘촘히 자라는 사이사이에 숨은 보랏빛 비로용담이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7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대암산에는 노란색 참좁쌀풀과 폭죽이 터지는 듯한 모습의 꿩의다리가 만개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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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는 용늪이 유일한 자생지인 비로용담. 높이 5~12cm에 불과한 여러해살이풀로, 7~8월 짙은 벽자색(碧紫色) 꽃을 피웁니다. 꽃 크기는 2~3cm로 식물체에 비해 비교적 큰 편입니다. 금강산 비로봉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이름을 얻었는데, 백두산 수목한계선 위 풀밭에서도 자라는 전형적인 북방계 고산식물로 꼽힙니다. 비로용담은 곧 용늪이 북방계 고산 습지식물의 피난처이자 남방한계선이라는 걸 입증합니다. 다행히 그 귀한 비로용담이 나무 통로 양편 바로 밑에 대여섯 송이나 피어 있습니다. 그 덕에 습지에 단 한 발짝도 내딛지 않고, 나무 통로에 엎드려 사진을 담습니다.

용늪 습지 안과 주변 산지에는 비로용담 외에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5개의 희귀 식물이 자생합니다. 기생꽃과 제비동자꽃, 조름나물, 닻꽃, 날개하늘나리가 그들인데 개화 시기가 맞지 않아 이번에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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