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세상읽기] 아름다운 거리를 산책한들, 곁에 우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나

[논객칼럼=이계홍] 필자가 사는 세종시의 아파트 단지는 조경이 잘 돼있어서 집 밖으로 나오면 마치 큰 공원에 들어선 것같다. 단지 옆 길게 뻗어내린 동산까지 포함하면 아파트 단지는 흡사 중세 유럽 왕들이 거처하는 장원 같다. 단지에 들어서면 길목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있고,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공원엔 온갖 풀꽃들이 향기를 풍기고, 그 사이 소롯길을 걷는 낭만은 걸을 때마다 어떤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아침 저녁이면 단지를 한바퀴 돌고 오는데, 1시간 가량 걸린다. 피고 지는 꽃들과 이슬 머금은 이름 모를 풀들을 보며 걷는 맛은 평화와 행복과 마음의 고요를 주기에 족하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 안에서 이런 마음의 사치를 누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젊은층이고, 그래서 아이들이 유독 많다. 세종시민의 평균연령이 32세 정도라고 하니 아이들 천지를 실감한다. 해거름녘, 아이들이 놀이터로 나와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을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따라 나온 젊은 부모들도 한결같이 밝고 유순해 보인다. 필자는 산책을 통해 새로운 이웃을 만들고, 동아리에도 참여하고 있다.

3년 전 세종시의 직장에서 퇴직한 뒤 필자는 한때 그동안 살아온 서울로 올라갈까 망설였다. 그러나 새로운 인연들과의 이별이 아쉽고, 세종시의 아름다운 아파트 단지와 헤어지는 것도 공연히 손해보는 것 같아서 근자에는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사람들 만나 정들면 이웃 사촌이 아닌가.

필자는 2014년 국책연구기관이 서울에서 세종시로 이전해오면서 그 소속원으로 함께 이주해왔다. 직원들에게 여러 가지 분양 인센티브를 주어서 현재의 아파트에 입주했다. 다른 부처 공무원들도 세종시내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 이도 있지만, 대개는 세를 주거나 전매하고, 대신 오피스텔·원룸에서 지내다 금요일 오후 서울 집으로 올라갔다가 월요일 아침 사무실로 출근하는, 이른바 ‘4세 3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즉 4일은 세종시에서, 3일은 서울에서 사는 생활 방식이다. 공무원들이 금요일만 되면 서울로 올라가기 바쁘니 모처럼의 주말, 세종시가 북적거릴 이유는 전혀 없다. 이들을 믿고 상가를 임대해 장사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황당할 것이다.

세종청사 공무원들은 매일 출퇴근을 선택한 직원도 있었다. 국가에서 서울-세종간 출퇴근 버스를 배정해 운행하는데, 필자가 퇴직하던 2016년 현재 14개 국책 연구기관이 들어선 연구단지에서는 매일 버스 27대가 운행했다. 세종 행정종합청사의 경우 130대가 운행된다는 말을 들었다(지금 상황은 잘 모르겠다). 세종-서울을 매일 왕복하는 개인의 고단함과 길바닥에 돈과 시간을 내버린다고 해서 ‘고단한 길국장’ ‘길과장’이란 말도 나왔다.

국가가 여러가지 분양 혜택을 주어서 세종시 아파트에 입주토록 했으면 당연히 내려와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아이 교육문제 등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런 각자의 사정 때문이라면 직장을 내놓든지, 아파트를 분양받지 말았어야 했다. 예산편성권과 집행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매년 백 억대가 넘는 출퇴근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은 어느 일면 공적 횡포다.

세종시는 명색 행정수도(행정복합도시라고 하지만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라고 하는데, 시내 상가 상황은 대단히 안좋다. 세종시내에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도산하고, 상가는 텅텅 비었다. 상가 공실율이 30-40% 대로 전국 최고라고 하니 이러다가 세종시 자체가 ‘도산 도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말이 30-40% 선이지 어떤 곳은 반 이상이 비고, 그래서 심리적 공실율은 더 심각하다.

행복도시건설청이나 LH가 여러가지 수요 예측을 한 끝에 상가지를 분양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돈 벌 욕심만으로 과도하게 분양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기행위다. 상가지를 분양받은 업자는 융자를 받아서 수익을 꿈꾸고 건물을 지었을 것이고, 세입자는 먹고 살겠다고 점포를 임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가 망했다면 결과적으로 그들은 제도의 오류로 손실을 본 셈이다.

필자가 사는 아름동은 대형 상가 건물이 3열 횡대로 총 9동이 들어서있다. 최근에는 싱싱장터 6층) 건물이 또 들어섰다. 도대체 일개 동의 인구가 얼마인데, 시급(市級)의 상가지를 조성했을까. 의원, 학원, 태권도장, 식당, 카페, 주점, 문구점 등이 들어섰지만 1층에서 6층까지 전체적으로 빈 상가가 수두룩하다. 인근 아파트단지마다 또 크고 작은 가게들이 즐비하다. 모두들 파리를 날리고 있다.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해 이들 상가를 지나치는데 빈 상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리다. 멀쩡히 장사를 했다가도 나중 지나다 보면 벌써 문이 굳게 잠겨있고, 식당의 탁자와 의자들이 엎어져있는 경우를 본다.

한때 잘 나갔다는 동네 대형 L슈퍼는 상가를 비운 지 1년이 넘도록 입주 업체가 나타나지 않고, 요지에 있는 제과점도 나간 지 2년이 넘도록 새 입점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체국과 기존 상가 건물 사이에 있는 7층짜리 상가건물은 1년 이상 공사를 멈추고 있다. 은행 융자를 받아 건물을 지었을텐데 그 이자 비용만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세종 지역신문인 세종포스트에 따르면, 이 건물은 건축주가 대금 변제를 하지 못해서 시공사만 3번째 바뀌었다고 한다. 세 번째 시공사도 동일한 상황으로 공사를 중단했는데, 이로 인해 일부 호실을 분양받은 수분양자(분양대금을 완납했음에도 분양자측의 사정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받지 못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 동네만의 사정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특정한 일부만 제외하고 이같은 현상은 일반화 되었다. 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행정당국에 있다. 수요 예측없이 상가지를 분양하고, 그런 다음에는 나몰라라 하는 책임회피, 이것은 윤리적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행정 오류에 대한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상공 담당 공무원이 직접 현장에 나가 입지 조건을 살피고 업종 선정을 조언하고, 인구밀도에 따른 수요 예측과 이익 추계 등을 시물레이션을 통해 지도하며 입주 업자를 돕는다고 한다. 우리는 그 정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마구잡이식 분양만은 막았어야 했다. 미래 예측도 없이 상가지를 분양해놓고 입 싹 닦으면 그만인가.

시와 정부는 상가 공실율을 줄이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중앙 행정부처 공무원들이 세종 시내에 나와 소비를 해주는 일이 시급하다. 필자가 연구기관에 근무할 적에 본 것이지만, 대부분 직원들은 구내 식당을 이용한다. 퇴근 시간 이후에도 세종 시내에 진출해 소비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밤이 되면 중심가는 흡사 수도원 같다. 명색 행정 수도라고 하지만 세종청사와 세종시는 완전 별개의 세계에서 노는 것 같다. 세종시민에게 중앙 행정부처는 외로운 고도처럼 멀리 떨어져있다.

물론 이들을 위한 제반 편의시설이 태부족해서 그들을 견인해내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여러가지 행정 규제 때문에 생긴 후유증이다. 인구 35만을 향해 가는데 이 시간 현재까지 종합병원, 숙박시설 하나 들어서지 못했다. 신축중이라지만 지금까지 시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니 정작 소비자에게 예의를 다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세종시의 상권 형성을 위한 제안을 몇가지 붙인다면-

첫째, 비어있는 대형 상가 건물을 행정부처가 임대해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청사 건물을 신축할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빈 건물을 임대해 사용한다. 시 인구가 늘어나고, 자체 자생력이 생길 때까지 임대해 사용함으로써 중앙 부처 공무원과 주민간의 친밀감과 유대감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진출입으로 인근 상가 수익도 올려주는 방안이다. 물론 상가를 공공건물로 사용하는 데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접근성, 주차장, 공간 배치 등등.... 그러나 신축 건물이기 때문에 리모델링도 유용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뿐만아니라, 세종시도 공공 건물을 신축하는 대신 이런 유휴 건물들을 임대해 사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둘째, 각 부처에 인허가권, 민원 업무를 비롯한 실무를 세종 청사에서 수행하기 바란다. 이를 위해 서울사무소를 폐쇄해야 한다. 주요 업무들이 서울사무소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니 세종청사 이전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중적 근무환경과 시설의 이중운영이 따른다. 부산 목포 등 지방에서 2시간이면 닿는 세종시를 지나, 비싼 임대료를 낸 서울 사무소를 찾고, 역시 비싼 밥값, 비싼 숙박료를 내고, 매연과 배기가스 자욱한 교통지옥 서울 거리를 헤매며 일을 본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부산 울산 목포 여수에서, 업무를 보아야 할 세종시를 지나 서울까지 가서 일을 보는 것이야말로 낭비 아닌가. 세종시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전국이 고루 2시간 이내에 닿는다는 점이다. 당일치기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공간적 여건이 확보되어 있다.

셋째, 세종청사 공무원들에게 의무적으로 지역 화폐를 발행해 세종시의 업소를 이용하도록 권장한다. 세종시의 땅을 딛고 미래 성공의 꿈을 실현하려 한다면, 그런 꿈을 꾸게 한 곳에 얼마간 돈을 쏟아주어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상가가 죽을 쑤는 것은 공무원들이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덤터기 씌우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공무원이 수만명 내려온다니 기대를 걸고 상가를 분양받은 것이고, 분양자는 그것을 맨앞에 내걸고 호객행위를 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공무원들이 세종시에 정주하는 일이다.

앞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도 세종시로 내려오고, 사법기관도 와야 한다. 명실공히 행정수도로서 기능을 다하도록 계획에 충실하면 된다. 따라서 행정을 통할하는 청와대가 먼저 내려와야 할 것은 당연하다. 힘있는 수도권의 지역이기주의에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행정수도 이전의 취지에 충실히 복속하면 된다. 수도권 밀집으로 인한 국토의 과부하와, 그로 인한 제반 역기능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필자는 빈 상가 앞에서 절망하는 상인을 볼 때마다 공연히 미안해진다.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손해를 강요받는 그를 보고 돕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주변에 우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공원을 산책하고, 예쁜 꽃을 보아도 행복해질 수 없다. 이웃의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가는데 나 혼자 꽃피고 새우는 공원을 산책한들 무슨 재미가 있는가.

이계홍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여론독자부 차장

서울신문 수석편집부국장 통일문제연구소장

용인대 겸임교수,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객원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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