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청년칼럼=시언]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다분히 철학스러운 질문에 빠져있던 내 머릿속에 뜬금없이 독서토론과 글쓰기를 담당했던 교수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여러분이 글을 잘 쓰려면 줄거리를 요약할 줄 아는 게 핵심입니다”

당시 스무살이던 나는 코웃음 쳤었더랬다. 줄거리야 책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읊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발 큰 난쟁이들이 마법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는 이야기’ 따위를 쓰는 게 글쓰기의 핵심이라니. 중요한 건 작가가 숨겨놓은 지적 퍼즐을 찾아내고, 그를 맛깔나게 해설하는 지성과 필력이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향후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책 리뷰를 쓰면서도 이놈의 ‘줄거리’가 그토록 골치를 썩힐 것이라는 걸 말이다.

Ⓒ픽사베이

줄거리의 핵심은 ‘편집’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에 따라 원작의 내용 중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클로즈업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의 줄거리라 할지라도 내가 쓸 독후감의 주제와 맞지 않는다면 빨간펜으로 그어져야 할 잡문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발 큰 난쟁이 이야기’가 좋은 줄거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이 같은 줄거리는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읊을 수 있는 수준이다. 원작이 내게 준 느낌과 통찰을 정확히 동어반복하는 독후감이 줄 수 있는 효용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여기서 리뷰어에겐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대표 사건을 바라보는 통상적 시각을 비트는 방법과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소한 사건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의미를 발굴해 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론은 자신의 과거를 반추, 즉 리뷰(Review)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모든 이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일종의 줄거리를 갖고 있는 까닭이다. 어떤 사건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사건은 없던 일인양 삭제되는 과정에서 기억은 각자가 지닌 고유의 스토리가 된다. 나는 이런이런 일들을 겪었고, 그 사건들을 저러하게 해석했으며, 고로 지금의 내가 있다는 식의 레파토리다.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확언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행복’이라는 주제로 잘 편집된 줄거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좋은 인생의 줄거리를 갖는 방법도 독후감 쓰기와 다르지 않다. 대표 사건을 바라봤던 자신의 시각을 비틀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사소한 사건들을 재소환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망가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날의 기억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사건이 나를 얼마나 더 강하게 제련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잘 견뎌온 나에 대한 평가는 정당했는지에 관해 숙고해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가 변한다. 반대로 한번도 주목해 본 바 없던 사소한 일상에 앵글을 맞출 수도 있다. 기진할 때면 찾곤 했던 코인 노래방에서의 추억, 처음으로 작심삼일을 넘겨 4일째 운동을 나갔을 때의 뿌듯함 따위의 것들에 말이다.

무용하고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터무니 없이 느껴질 수도 있다. 친구들은 그날의 파티가 얼마나 신났는지, 애인과 떠난 부산 여행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SNS에 자랑하기 바쁜데, 나는 고작 아무도 관심 없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꼴이라니. 그럴 때마다 나는 몇 년전 한 외신 기사에서 본 사진을 떠올려 보곤 한다. 한 현대 미술관에서 이름 모를 관광객이 작품 공간에 우연히 안경을 떨어뜨렸고, 사람들은 그 안경이 작품인 줄 알고 너도나도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당시 기사의 논조는 작품과 작품이 아닌 것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이른 현대 미술의 난해함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진은 내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소한 것도 작품이 될 수 있다고, 그저 예쁜 액자에 담아 찬찬히 관조해 보면 그 나름의 의미를 그러낸다고 말이다.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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