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자칼럼]

[오피니언타임스=하늘은] 고향이 부산이지만 생선을 잘 먹지 않는다. 간혹 귀한 손님을 만나는 날이면 회를 대접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 입에는 육류가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서른을 훌쩍 넘겼지만 생선 가시를 잘 발라내지 못한다. 스스로 생선의 미세한 뼈를 헤치고, 부드러운 살코기를 발라먹는 일은 거의 없다. 환갑을 바라보는 어머니, 아이 둘을 키우는 아내가 생선을 발라줄 때만 ‘물고기’를 먹을 수 있다.

나와 다르게 세 살배기 아들은 육류보다 생선을 좋아한다. 삼겹살은 먹지 않지만 ‘고등어’는 좋아하며 소고기는 등한시하지만 ‘갈치’에는 환장한다. 이를 어쩌나. 이 사실을 깨닫고 마트에서 장을 볼 때면 어김없이 생선을 산다. 시장에 가서도 식육점이 아닌 해산물 코너를 찾는다. 어느 날부터 우리집 밥상에는 생선이 꾸준히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픽사베이

근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내가 생선을 굽다가 급작스레 둘째 아이를 돌봐야할 때면 내가 그 작업을 마무리해야했다. 여기서 ‘작업’이란 생선을 뒤집고 바싹 익힌 뒤 가시를 발라내는 일이다. 처음에 젓가락으로 가시를 발라내려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손으로 허겁지겁 살코기를 발라내고 아들이 먹기 좋도록 잘게 만들었다. 가장 어려운 생선은 갈치였는데 가시가 정말 미세하게 많기도 했고 살코기가 흐물흐물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마치 고체와 액체의 중간 성격의 느낌이랄까.

난 여전히 내가 먹을 생선 가시를 발라내는 일은 없다. 그 노력이면 삼겹살을 몇 점 더 먹을 수 있기 때문. 그 노력이면 깻잎에 밥을 싸서 먹고 돈까스도 한 점 먹을 수 있기 때문. 그 노력이면 잠시나마 낮잠을 잘 수 있기 때문. 그 노력이면......

하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하는 일도,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되는 부모의 심정. 우리 어머니는 평생 내 생선 가시를 발라주셨는데. 그리고 인생의 숱한 가시밭길을 걸으실 때마다 나를 엎고 두 발로 가시 위에서 지탱하셨을 텐데. 그렇게 어머니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되셨다. 보이지 않는 가시가 온 몸에 박혀 심장, 무릎, 어깨 성한 곳이 없다.

이제는 내 차례다. 세상에는 애초부터 가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름다운 것만 보게 해야지. 아들이 온실(greenhouse) 속의 화초로 자랄지라도 괜찮다. 내가 평생 그의 온실이 되어주면 되니까.

생선 가시를 바르다 별 생각을 다한다. 나도 늙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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