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청년칼럼=김봉성] 여남은 살의 나는 파리 잡기 명수였다. 파리 위 5cm 허공을 손으로 잽싸게 훔치면 위험을 감지하고 날아오른 파리를 생포할 수 있었다. 잡은 파리는 바닥에 패대기쳐 죽였다. 파리의 체액이 손이나 파리채에 묻지 않아 그나마 위생적이었다. 제법 열심히 잡았다. 착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생포한 파리로 1.5리터 페트병을 채웠다. 그냥, 심심했다. 막상 시작하니 혼자만의 승부욕이 도져 투명한 페트병이 콜라병으로 보일 정도로 파리를 모았다. 방생할 생각은 없었다. 파리가 해충이라는 사실은 둘째 치고, 파리는 당장 내 살에 달라붙는 귀찮은 존재였다. 파리의 처리를 두고 5분쯤 고민하다가 페트병 안에 에프킬러를 뿌리고 뚜껑을 잠갔다. 파리들은 미친 듯이 내벽에 몸을 부딪쳐대다가 죽었다. 나는 최소한의 에프킬러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둬 뿌듯했다.

거대한 착한 일에 우쭐해져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의 반응은 의외였다. 인상까지 찌푸리시며 잔인하다고 하셨다.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덧붙이셨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여야 하는 파리였고, 패대기쳐 당하는 추락사보다 질식사가 온순하게 여겨졌다. 나는 내 전리품을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하다 버렸다. 어디에 버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죽은 파리가 시시하게 느껴진 끝맛은 기억난다.

그날의 엄마를 이해하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 인사이드’의 모기 갤러리 덕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이 죽인 모기를 인증했다. 인증 사진은 SNS와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로 퍼졌다. 포털에서 ‘모기 갤러리’를 검색하면 기발한 처형 사진들이 나열되었다. 얼음에 얼렸고, 단두대를 만들어 몸을 베었고, 배에 주사기를 꽂아 피를 뽑았고, 과녁에 모기를 붙인 후 BB탄 총으로 쏘았고, 전류를 흘려 태웠다. 모기 갤러리뿐만 아니라 게시물이 확산된 다른 커뮤니티에도 ㅋㅋㅋㅋ가 난립했다.

이 사태가 보기 불편했다. 이들은 놀이 중이었다. 처형 방법이 독창적일수록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20여 년 전 내가 처형한 파리를 인증한다면 ‘아우슈비츠’를 매단 댓글들이 좋아요를 눌러댈 것 같았다. 20여 년 전의 엄마는 ‘생명을 장난감 삼을 수 있는 마음’에 놀라셨을 것이다.

Ⓒ픽사베이

물론 해충은 죽여야 한다. 목적은 위생이다. 투표만으로 모기를 멸종시킬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그러나 모기 갤러리의 그들과 여남은 살 나의 목적에 위생은 없었다. 위생은 생명을 수단화해도 되는 면죄부처럼 사용되었을 뿐이다. 해충 박멸과 생명 유린의 마음은 다르다.

인류의 윤리 감각은 생명을 수단화 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진화해 왔다. 현대 사회는 사형수의 목을 베지 않았다. 사형수의 장기라도 적출하면 사회 공리는 증대될 테지만, 그들은 결코 장기 제공 더미(dummy)로 전락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 고기가 되는 닭, 돼지, 소도 사형수처럼 최소한의 고통 속에서 죽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 의식이 높아졌다지만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요즘은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을 주로 쓴다. 애완은 사랑 愛와 장난할 玩으로 결합되었다. 반려는 짝 伴과 짝 侶으로 결합되었다. 집에서 키우는 개, 고양이 등에 대한 인식이 감정의 대상에서 인생을 함께할 또 다른 주체로 격상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개, 고양이는 필요에 의해 길러졌다가, 불필요해지면 유기되었다. 며칠 전 자신의 개를 학대한 유튜버가 떳떳하게 굴었던 것도 개를 필요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에서 열리는 각종 동물 축제에서도 동물은 생명이 아니라 상품이었다. 이제는 한국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은 화천 산천어 축제의 경우, 산천어를 공수해 와서 축제에 동원되었다.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 죽였다. 아이들의 웃는 이미지와 이색 체험으로 예쁘게 포장되지만, 이 축제의 본질은 공적으로 용인된 산천어 대학살이다.

생명 존중이 육식이나 동물 실험 반대처럼 극단적 윤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한 에너지 섭취는 자연 현상이다. 동물 실험은 동물을 수단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육식과 다르지 않다. 동물 실험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이성이 고도로 발달한 인간이 인간의 안전을 위해 다른 생물을 잡아먹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 윤리의 최소한이다. 사이코패스의 살인은 동물학대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갑질은, 동물을 아끼는 마음보다 모기의 날개와 다리를 핀셋으로 뜯어내며 낄낄대는 데서 잉태되기 쉬울 것이다. 그러니 모기는 ‘그냥’ 죽이자. 모기는 불필요한 존재지만 아무튼 생명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습관이 갑을 관계로 경직된 사회를 마사지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필요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으니까.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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