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청년칼럼=이광호]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사회적 이슈를 이만큼이나 몰입감 있게 휘몰아쳐 내놓다니.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 기다리고 있으면 결말에서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보여주겠지, 하는 기대감.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펼쳐진 손바닥에 해결책 따위는 없었다. 손톱자국과 얼마간의 땀이 배어있었을 뿐. 그 순간 영화에 던져두었던 ‘해답이 뭐죠?’ 라는 질문은 관객의 몫으로 돌아온다. 변형을 거쳐 돌아온 질문은 더욱 까다로워져 있다. ‘너는 왜 영화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니?’, '네가 생각하는 문제는 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질문의 의도가?

영화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오히려 다른 질문이 돌아오니 당혹스럽다. 어쩔 수 없다. 우선 답을 찾으려 했다는 건 문제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니 문제가 뭔지를 먼저 생각해보기로 했다. 첫째, 부정의와 모순 앞에서 내가 당장 무엇을 해야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둘째, 문제가 뒤죽박죽 섞여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둘을 합쳐 답하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온갖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도다.

졸업장을 위조하는 장면에서 학벌중심 사회의 문제점을, 거주지에 따라 달라지는 재난 불평등을 느꼈다고 말하는 게 조금 더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얘길 하다 보면 뭔가 아득해지는 때가 많은데, 논의가 국가나 정부, 심지어는 세계를 향해 거대한 항로를 그려나가는 만큼 나와는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가 뾰족해질수록 해결책을 콕 집어 올려 기어코 한 점 베어 물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들기도 한다.

나는 뭘 해야 하나. 그냥 살면 되나? 나는 국가도 정부도 아니고 CEO도 아닌데. 그냥 멋대로 살면서 손가락질이나 하면 되나? 하는 자책에 시달리다가도 전 지구적인 문제가 정치, 경제를 떠나 해결될 수 없기에 비슷한 체급을 맞추려 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논의와 노력들이 만들어낸 성과 또한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걸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들을 두고 어느새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엔 '전 자본을 사랑합니다. 돈 많은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나 개처럼 돈 쓰는 게 소원입니다. 자본주의 짱짱!' 망하는 건 다 본인이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겁니다.'라고 외치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해결점을 찾다 도착한 곳에 '지금-여기'의 '내'가 빠져있다는 결말을 당할 자신이 없기에 차라리 위악적인 포즈를 취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런 자세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혁명은 어때?

2013년도에 나는『설국열차』에 빠져 자발적으로 봉준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설국열차』를 지배자 계급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혁명으로 읽어냈기 때문이다. 기차가 폭발하는 장면에서 느꼈던 쾌감을 현실에 가져올 수는 없나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체제 내에서의 전복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제를 유지하려는 자와 전복하려는 자의 입장과 논리, 정당성이 팽팽히 맞설 때 그 체제 자체를 파괴(기차를 폭발)해버리는 결말은 지금 우리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체제 밖을, 혹은 이후를 생각해보자는 의미에 가까웠다.

오독의 경험을 딛고 다시 생각해보면 '멈춰서는 안 되는 엔진과 무한히 움직이는 열차의 궤도'는 성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환상 혹은 멈출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존재하는 자본의 세계처럼 보인다. 기차의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는 ‘남궁민수’의 말을 미친 사람의 말처럼 취급하는 것도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금기처럼 여기는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꼬리칸 사람들이 먹는 양갱이 벌레를 원료로 했다는 게 밝혀지는 장면도 누군가의 삶을 갈아 넣어 그것을 동력으로 하는 자본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하지만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은 어디에도 없다. 체제 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이유가 있다. 설국열차의 머리칸에서 이뤄지는 윌포드와 커티스의 대화를 엿들어봐도, 기생충으로 돌아와 봐도 마찬가지다. 기생충에선 애초에 혁명을 선택지에 올려놓지도 않는다. 부잣집에 기생하고 있는 피지배층이지만 이해관계 앞에서는 서로를 모욕하거나 회유하려 든다. 심지어는 서로를 죽인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계급'이라는 거대한 틀로 쉽사리 묶이지 않는다는 게 자명해지는 순간이다.

상상도 자본주의 내에서만?

『기생충』으로 돌아와 보자. 기우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걸 안 이상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러 지하실에 사실상 감금되어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우는 그 방법으로 '부자가 돼서 그 집을 소유하고 아버지는 계단만 올라오시면 된다'라고 말한다. 자본의 문제로 일어난 문제를 자본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게 실현될 가능성을 따지는 건 나중으로 하더라도 기우는 잘 되어봐야 아버지를 구출해내고 한국사회에서 정상가족으로 보여지는 가족 공동체를 회복(애초에 정상가족 따위는 없다고 여기지만 대체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를 향해 던져졌던 구조적 문제들은 고스란히 남는 것이다.

『설국열차』에서는 체제 밖의 가능성을 상상했지만 기생충에선 현실 밖을 내다보지도 않는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모욕이나 절대빈곤 등은 열차 내에서 혁명을 일으킬만한 충분한 동력이 되지만 기생충의 사회엔 그럴 동력도 계급도 없다.『기생충』에선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관객들 또한 기우의 꿈이 독백체로 흘러나오며 스크린에 재현되지만 그게 꿈일 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영화는 송강호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 장면이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관객들이 깨닫는 순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돌아간다. 그래서 기생충을 보고 나서 찜찜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영화관에 내는 만 원 남짓의 비용에 '해결책'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를 배신하고 관객에게 돌려줬으니 말이다. 그 불쾌함마저 의도했다고 하면 너무 큰 오독일까. 분명한건 현 한국사회의 문제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 그 이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내 머릿속에 당분간 기생해도 된다는 결론. 땅땅.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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